세계적인 연구소를 뛰쳐나온 대학원생
독일이 자동차 산업으로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만, 독일에서 잘 나가는 산업에 자동차 산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과학 쪽에서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생명공학을 전공한 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막스 플랑크 연구소 역시 독일에 있다.
독일 석사과정들이 한국의 석사과정들에 비해서 수업을 많이 포함한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다녔던 드레스덴 공대에서는 일주일에 수업이 5-10시간 사이였다. 대부분의 시간은 실험실에서 랩 로테이션(lab rotation)을 하면서 보냈다. 랩 로테이션은 학생들이 하나의 랩을 정해서 그 랩에서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랩에서 프로젝트를 해봄으로써 자신에게 맞는 분야, 혹은 자신에게 맞는 랩을 찾아낼 수 있게끔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나는 석사과정 동안 세 번의 랩 로테이션 기회가 있었고, 마지막 랩에서 석사 논문을 썼다.
따라서 흔히들 독일 석사 유학의 단점으로 꼽는 "연구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하다."라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반대한다. 그런 학교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모든 학교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항상 강조한다. 한국에서 연구 경험이 많이 없었던 나는 독일에서 다양한 분야의 실험실을 경험해 본 덕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연구 자체가 재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지식을 내 손을 통해 창출해낸다는 생각은 굉장한 뿌듯함과 일종의 사명감까지 안겨주었다. 생전 나는 내가 현미경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결국 내 석사 논문 프로젝트는 쥐와 사람의 췌장조직을 현미경으로 촬영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나서, 나는 같은 실험실에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내가 소속되어있던 헬름홀츠 연구소는 그 유명세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 비해 덜하지만, 독일의 대표적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다.
나는 랩 로테이션을 했던 랩에서 석사논문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이미 랩 로테이션을 하면서 했었던 연구였기에 조금 더 이어서 할 때 모든 걸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코로나로 석사 졸업이 늦춰질 뻔했지만, 밤새 논문을 쓰다가 코피를 쏟아 과다출혈로 병원에 실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제 때 끝내겠다는 악착스러운 태도로 임했더니 예정했던 기간 내에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찾아온 건 여러 문제들이었다. 일단 독일은 10월에 학기가 시작하기 때문에 새로 들어오는 신입생들을 위해서 9월 말일까지는 기숙사를 비워줘야 했다. 그리고 석사생은 2년이 최대 계약기간이었기 때문에 졸업이 늦춰진다한들 기숙사 계약을 연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직 디펜스 (졸업논문 발표)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사를 해야 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는 디펜스 전에 갖고 있었던 학생 비자가 만료됐다. 졸업은 마냥 좋을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학교의 보호를 받던 학생 신분에서 백수 신분으로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비자를 연장하려면 내가 여기서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고 내 생활을 이어나갈 재정적인 능력이 된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는데, 이것마저도 문제였다.
졸업과 동시에 소속도, 집도, 비자도 없는 신세가 되어버릴 위기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Research assistant로 자신이 일하던 랩에서 급여를 받으며 일을 하는 것이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석사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에는 무료로 부릴 수 있는 인력이 석사 졸업과 함께 유료 인력이 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training이 다 되어있고, 해당 프로젝트를 제일 잘 아는 학생이 프로젝트를 더 이어서 하겠다고 하면 굳이 안 받아줄 이유도 없다.
한국에서는 실험실에서 나오기가 참 어렵다. 학부생 때 인턴을 했던 학생들에게는 석사를 여기서 하라는 꼬드김이 있고, 석사를 한 학생들에게는 박사를 하라는 꼬드김이 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하는 것은 다소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때로 어떤 교수님들은 화를 내거나 학생과의 연을 끊기도 한다. 제대로 삐지는 것이다.) 독일에는 그런 압박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다른 곳으로 갈 것이라는 것을 다들 염두에 두고 있다. 우리 교수님도 내게 PhD 오퍼를 하셨지만, 내가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럼에도 졸업 후에 research assistant로 받아주셔서 약 6개월간 월급을 받으며 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여러 랩들도 돌아보고 한 랩에서 오래 있어보기도 하면서 독일의 연구환경이 정말 좋은 것은 인정하는 한편으로, 박사과정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워라밸 없는 삶
다른 분야는 이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생물학 분야에서는 생물학 실험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워라밸은 사치다. incubation이라는 단계는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생물학적인 반응은 내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해서 빨리 일어나지는 것이 아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내가 앞으로 10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해서 대소변을 미리 앞당겨서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어쩔 수 없이 소화가 되길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있다. 생물학 실험에서는 이런 것들이 모든 단계에 걸쳐서 산재해있다. 어떤 반응은 빨리 일어나기 때문에 빨리빨리 움직여서 실험을 해야 하기도 하고 어떤 반응은 적어도 1시간은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실험 중간에 이렇게 쉴 짬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반응은 10시간, 12시간 24시간 등 제각각으로 incubation 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실험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따라서 새벽에 일어나서 실험실을 가야 하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남아서 실험을 해야 하기도 한다. 세포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이들은 오늘이 평일인지 주말인지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박테리아를 키워서 실험을 한다면 주말에도 박테리아 밥을 주고 집을 청소해주러 가야 한다. 정말 실험이라는 것이 무서운 게, 내가 조금만 꾀를 부리면 금세 눈치를 챈다. 조금 편하게 하자고 머리를 쓰면, 결과가 잘 안 나온다. 그럼 그 실험을 다시 해야 한다. 결국 더 먼 길로 돌아가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새벽에, 주말에 나오라고 하지는 않지만, 나 스스로의 연구를 위해 사람들은 아침잠을, 퇴근 후 삶을, 주말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실험실에 나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싫었다. 이미 20대 후반을 달려가고 있는데 나도 편안하게 일과 삶을 같이 즐기고 싶었다. 일을 좇아서 다시는 오지 않을 이 순간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2. 체력의 한계
내가 연구를 했던 독일의 모든 실험실에는 테크니션 (technician, 기술자)들이 있었다. 오히려 독일에서는 테크니션이 없는 실험실을 찾기가 더 어렵다. 아무리 작은 랩이어도 테크니션 한 명쯤은 다들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참 흔하지 않은 광경인데, 이 사람들의 존재가 학생들의 연구 퀄리티를 크게 좌우한다. 이들은 실험에 정말 숙달이 되어있기 때문에 실험을 거의 로봇처럼 수행한다. 내가 봤던 가장 놀라운 테크니션은 수다를 떨면서도 1초 단위까지 틀리지 않고 실험을 딱딱 맞춰서 하는 사람이었다. 입으로는 수다를 떨지만 그녀의 손은 1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기본적인 실험 준비를 도와주고, buffer (완충제, 실험실에서 쓰이는 용액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를 만들어주고, 사용하고 난 실험 도구들을 항상 세척해서 캐비닛 안에 넣어두는 실험실과 그 모든 잡다한 일들을 학생 스스로가 다 해야 하는 실험실은 당연히 학생의 workload가 다를 수밖에 없다. 덕분에 나는 석사를 하면서 실험 도구 설거지를 해본 적은 없었다. 사용한 도구들은 한쪽 바구니에 넣어두면 밤인지 아침인지 media kitchen이라는 곳에서 이 도구들을 수거해가서 세척해주고, 또 빈 캐비닛에 새로운 실험 도구들과 소독된 물, 매일같이 쓰는 buffer 등을 구비해줬다. 이렇게나 일이 쉬운데 무슨 체력의 한계를 논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허드렛일을 안 한다고 해서 몸이 편한 것은 아니다. 실험과 결과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도 하고, 내 실험만 보더라도 몸을 쓰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무거운 용액을 들고 내리고 하는 일부터 하루에 10시간이 넘게 한 번도 쉬지 못하고 서있거나 돌아다녀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또 incubation시간에 앉아있는다고 해도 이것이 편히 쉬는 것과는 또 다르다. 그래서 실험이 많았을 때는 집에 와서 녹초가 되어서 잠들었다. 집을 거의 찜질방 수준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나를 발견하고는 이게 내가 정말 원했던 삶이 맞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3. 업무 강도에 비해 낮은 연봉
독일에서는 석사를 졸업한 사람은 얼마, 박사과정생은 (경력에 따라) 얼마, 이런 식으로 연봉이 정해져 있다. 어떻게 보면 형평성이 있는 것 같아서 좋아 보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더 받을 수 있는데 더 받지 못하는 셈이기도 하다. 내가 research assistant를 하면서 가장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연봉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석사씩이나 했는데, 이 석사 졸업장 따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정작 내 통장에 찍히는 금액은 내가 한국에서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 계약직 인턴으로 일하면서 받았던 연봉에서 꼴랑 몇십만 원이 추가된 금액이었다. 하지만 나보다 경력이 많은 박사생들이 받는 금액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돈을 더 달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분야에 남아 있는 한, 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느꼈다. 박사를 하고 나면 또 포닥 (post doc, 박사 후 연구원)을 한다고 몇 년을 써야 하고, 그렇게 한다 한들 내가 교수직을 잡을 수 있을까? 박사와 포닥까지 생각한다면 아무리 빨라도 4-5년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만약 내가 그 시간을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쓴다면? 워라밸이 더 나아질까? 연봉은 더 높아질까? 무수히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이유들은 내가 결정적으로 헬름홀츠 연구소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아니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