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기똥차게잘할자신이 없다면, 둘을 적당히 잘하면 된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다. 재능을 타고 난 사람도 너무 많다. 그런데 난 그 어느 쪽도 아니다.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잘했지만, 열정이나 승부욕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큰 물에 나와서 깨달았다. 나의 어쭙잖은 열정으로는 지금 당장은 그들의 발끝에는 닿을 수 있었지만, 이러한 격차는 시간이 지나면 벌어질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생물학과를 다녀본 사람은 안다. ‘전공을 살려서 취업을 하고 싶으면 석사는 기본이다.’라는 말이 전설처럼 떠돈다. 이 외의 선택지를 원한다면 제약회사 영업직이 있다. 요즘에는 이 직무 자체도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해도 제약회사 영업직은 술자리에 절어서 살아야 하는 극한의 직업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생물학이 좋아서 생물학과를 왔는데, 공대에 있는 다른 과들과는 다르게 생물학과는 딱히 공대의 메리트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나온 과는 공대가 아닌 자연대에 있었다.)
그런데 또 제약사에서는 생물학과를 나온 학사보다는 간호학과를 나온 사람들이나 약대를 나온 사람들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잘하는 것 없이 취업에 뛰어들면 불 보듯 뻔히 K.O. 패를 할 것 같다는 섬찟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무턱대고 졸업해버린 후, 졸업식을 하기도 전에 취업전쟁을 피해 영국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현실도피를 하는 쪽을 선택했다. 꿈같은 2 년이 흐르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야 했을 때, 한국의 취업전쟁이 너무 무서웠다. 나는 2 년을 외국에서 보냈는데도, 영어 외에는 딱히 이렇다 할만한 스펙조차 없었다. 2년을 실컷 놀고 온 대가로 흔히들 말하는 “취준 (취업 준비)”를 하느라 1-2 년을 우울함 속에서 살아야 할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그 길고 긴 취준 길의 끝에서 마주한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까 봐 더 두려웠다.
그냥 나 자신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취준 하고 일자리 구해서 살 자신이 없으니, 외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영어에 한참 재미를 붙이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민을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때였다. 외국에서 직업을 구하고 계속 살기 위해서는 유학을 하는 것이 가장 쉽고 간단해 보였다. 워킹홀리데이를 다시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경력이 쌓여 있지 않은 상태에서 커리어에 의미가 있을만한 직업을 구하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판단했고, 계속해서 비자 문제가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에 아예 유학을 한 후 일자리를 찾는 것이 훨씬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리하여 오르게 된 유학길이었지만, 석사 졸업장과 함께 남은 것은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라는 확신이었다.
실험실에서 하는 일들이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것 외에도 워라밸 (work-life balance)은 꿈도 꾸지 못하는 이 분야의 특징도 물론 그 확신의 바탕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박사과정을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이 분야의 똑똑한 사람들을 내가 이길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누구나 군계일학의 학이 되길 원하지만, 실제로는 닭 떼 중 한 마리의 닭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차별화된 닭이 되기로 했다. 학으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진 못했으니, 닭 중에서 좀 눈에 띄는 닭이라도 하지, 뭐.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내가 잘하는 두 가지를 합치는 것이었다. 생물학만으로는 완전 이 분야에 미쳐서 밤낮으로 논문을 달고 사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들과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생물학 지식과 나의 비즈니스 경험 두 개를 합쳐서 희소성을 가진 “인재”가 되기로 했다. 세상에는 생물학에서 승승장구하는 천재들도, 비즈니스에서 승승장구하는 사업의 귀재들도 많다. 하지만 두 자질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드물다. 이 전략으로 나는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영어 원어민도 아니면서, 독일어 한마디도 못하면서, 독일의 바이오텍 회사에서 콘텐츠 마케터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