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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라야 남자 Aug 02. 2022

소중한 내 밥벌이 이야기

홈쇼핑 발자취_1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내 건망증 때문이다. 보통 대화할 때 그 상황과 내용에 걸맞은 적절한 단어나 구체적인 지명을 잘 활용하여 대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기억력까지 좋아 이전의 구체적인 상황까지 인용하며 풍부한 대화를 이끌어 낸다. 나는 그와는 반대다. 머리가 좋지 않아 단어를 잘 잊어버리고 최근을 제외한 상황과 내용들은 봄눈 녹듯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려 당시를 반추하려면 한참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유로 미리 준비한 발표 내용은 제법 잘 말할 수 있지만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질문이나 상황을 맞닥뜨리면 당황하기 일쑤다.


나는 2017년 1월부터 홈쇼핑 업무를 시작해 해당 유통 경력만 6년째이다. 이전에는 할인점, 아울렛, 올리브영 등의 채널을 짧게 짧게 경험했다. 어쩌다 시작한 홈쇼핑 경력이 내 회사 경력의 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대가들 앞에서는 부끄러운 경력이나 나름 나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경력인지라 이 안에서 겪고 지낸 일들을 이대로 기억 저편으로 묻어버리기에는 아쉬운 감이 크다.

주방·주방가전·생활가전 ·건강기능식품 등 다양한 카테고리에서부터 셀럽 방송과 다양한 일반 방송 경험들 그리고 새벽과 밤낮 가리지 않고 뛰었던 소중한 경험들을 하나하나 기억의 저편에서 끄집어내어 정리해보려 한다.


홈쇼핑은 다들 익히 아는 것처럼 TV를 틀면 나오는 TV쇼핑이다. 화려한 쇼호스트들의 입담과 재미난 시연, 매진 임박을 알려오는 사운드와 연출까지. 다양한 요소들이 이 안에 담겨 한 시간의 방송을 만들어 낸다. 홈쇼핑을 만들어내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당연히 상품(협력사)이다. 이 상품은 대기업의 브랜드일 수도 있고 수입상품일 수도 있다. 이 상품을 소싱해오는 역할은 홈쇼핑사의 MD가 한다. 시장 경쟁력 있는 상품을 좋은 가격에 가져오는 것이 MD의 주요 역할이다. 단언하건대 홈쇼핑의 MD는 그 어떤 유통사의 MD보다 상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홈쇼핑 채널 구조상 제품 특장점은 물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심의내용과 일정 부분 QA에 대한 지식과 경쟁사 제품 정보도 알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다음은 이 상품을 돋보이게 연출해 줄 수 있는 PD의 존재가 필요하다. PD는 방송 한 시간 동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해당 시간 동안 재핑(공영, 종편방송 프로그램 종료 후 광고시간)과 경쟁사 방송, 콜 추이 등을 보며 어떤 연출을 할지 실시간으로 의사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홈쇼핑의 꽃 쇼호스트다. 왕영은, 최유라, 최화정과 같은 각 방송사를 대표하는 기획 PGM의 셀럽도 있지만 대부분의 방송시간을 채우는 것은 이 쇼호스트들의 열정과 노력 덕이다. 이들은 상품에 대한 기본정보를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상품이 돋보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렇게 협력사, MD, PD, SH(쇼호스트)가 한데 모여 한 시간의 상품을 기획하고 준비한다. 방송 전 1차 또는 2차로 한 시간가량 사전 미팅을 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하나의 상품을 위해 꽤 많은 사람들이 준비하고 노력한다고 보면 된다.


이밖에 한 번에 대량으로 상품이 배송되기 때문에 품질을 관리하는 QA부서, 방송표현의 심의 준수 여부를 체크하는 심의부서 등 유관부서의 역할도 작지 않다. 때로는 QA와 심의로 인해 방송표현이 100이 되기도 하고 20이 되기도 할 만큼 영향력이 큰 부서이다. 카테고리마다 QA에 필요로 하는 서류는 천차만별이며 건강기능식품의 경우는 그 까다로움이 더할 나위 없이 높아 홈쇼핑 상품은 웬만하면 품질을 믿고 사도 괜찮겠구나 싶을 정도로 담당들이 생산지와 물류현장까지 방문하며 철두철미하게 확인한다. 주방 상품을 판매했던 시절에는 방송 전에 매번 20kg나 되는 냄비세트를 허리 높이에서 6면으로 낙하한 후 개봉하여 이상 유무를 체크하기도 했다. 심의 담당들은 사실 협력사나 MD같이 판매자 입장에서는 어려운 존재들이다. 방송 전 영상이나 대본 등을 이들이 검수하고 정정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은 표현들도 심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표현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품을 판매해야 하는 협력사나 MD들은 늘 심의담당과 투쟁 아닌 투쟁을 벌이며 심의 기준 내 표현 가능한 문구에 대해 타협 아닌 타협을 벌이고는 한다. 가령 ‘단백질을 먹으면 근육생성이 됩니다.’가 판매자가 사용하고 싶은 표현이나 심의가 제시하는 문구는 ‘단백질을 먹으면 근육생성에 도움이 될 수 있음‘과 같은 식이다. 건식은 특히 건강기능식품 협회의 심의필증을 기본으로 받아와야 이마저도 사용하게 해 주며 심의기준에 대한 논문이나 과학적  증빙도 함께 제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 상품을 온라인에서 팔건, 오프라인에서 팔건 똑같이 파는 일인데도 이렇듯 홈쇼핑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몇 배로 고되고 힘들기에 같은 영업이어도 홈쇼핑 담당하기를 기피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한 번의 방송으로 작게는 1억 많게는 10억까지 매출이 들어오는 이 마성의 매력을 갖고 있는 채널을 어찌 버릴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최근 몇 년간 이마저도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하게 짚고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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