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글쓰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친구들이 다 학교에 갔을 때, 가족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하얀 화면은 내 모든 것을 꺼내 보일 수 있는 나의 가장 내밀한 친구였다. 쓰는 것이 좋았고, 쓰는 것으로 곧잘 인정받았다. 언제부턴가 글쓰기를 빼고는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쓰기는 나를 이루는 구성 요소, 내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글쓰기가 구직 시장에서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으로 따라올 때 좋은 하드스킬이었다. 글쓰기 자체가 첫 번째 평가 요소, 그러니까 한 직무의 메인 요소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 할 학력과 스펙과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글쓰기라는 하드 스킬을 평가받는 데까지 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직을 준비할 때면 ‘이것밖에 되지 않는 나’를 비난했고, 안정적으로 이직에 성공했어도 다음 커리어를 생각하면서 또 다시 나의 쓸모를 의심했다. 그럴 때마다 엄한 글쓰기에 비난의 화살을 꽂았다.
“글 같은 거 써서 뭐해? 돈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너 좋으려고 하는 거잖아. 글 쓸 시간에 효용성 있는 다른 걸 해봐.”
쓰고 멈추고 자책하고, 다시 쓰고 멈추고 자책하는 시간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4개월이 지났다. 긴 터널을 지나온 것 같다. 좋아하는 동료가 퇴사를 했다. 마음의 쿠션처럼 비빌 언덕이 되어주던 친구들이 해외로 나가게 됐다. 카톡 하나면, 전화 한 통이면 만날 수 있었는데 더는 그럴 수 없었다. 부재를 실감할 때마다 울고 싶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멀어진 자리에서 또다시 나의 쓸모를 의심했다.
그렇다고 매일을 울적하게 보낸 것은 아니다. 평소대로 출근을 하고, 동료들과 박장대소하기도 하고, 유행하는 연애 프로그램을 같이 보는 크루들과 함께 과몰입하기도 하고, 밥도 잘 먹었다. 여느 때처럼 씩씩하게 몸을 일으켜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글쓰기 만큼은 하지 않았다. 하얀 모니터 앞에 앉기는커녕 자기 전 책상 앞에 앉아 낙서를 끄적이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가깝고 소중한 것들의 빈 자리를 직면하는 게 무서웠다.
소중한 이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나의 쓸모를 찾아 헤맸다. 나의 쓸모를 찾아야 했다. 쓸모를 증명할 방법으로 소개팅에 목을 맸다. 애잔하고 어처구니없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증명할 방법이 겨우 소개팅이라니, 애초에 내가 설정한 ‘쓸모 있는 인간’이란 무엇을 말했던 것인가? 당최 어떤 쓸모가 되길 바랐던 것일까? 내 가치가 무엇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 것일까? 내 쓸모의 권위를 누구에게 쥐어주려 한 것일까?
지금은 그때의 내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그때는 매우 공격적으로 소개팅에 몰입했다. 소개팅 앱을 여러 개 깔고 시간이 나는 족족 앱에 접속했다. 쇼핑하듯 상대방 프로필을 빠르게 훑고, 대화를 하고, 밥 먹기를 반복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공허했다. 공허하다 못해 시린 헛헛함을 마주할 때마다 ‘이게 맞아?’ 하는 질문이 몇 번이고 떠올랐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방법인 것 같았다. 하지만 떠오르는 질문을 외면한 채 다시, 또 다시 새로운 프로필을 찾아 앱에 접속했다. 공허함이 쌓일수록 나의 쓸모도 희미해졌다.
글쓰기를 재개했다. 소개팅 앱(을 지우지는 않았지만 모든 설정을 비활성화로 변경했고) 접속을 그만 뒀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노트를 펴고는 나를 향한 질문과 답을 끄적인다. 하얀 화면에 정돈된 문장들을 적어 내려간다. 주영이 때문이다.
“언니가 글을 진짜 잘 쓴다고 느낀 게 인스타에 올린 거 읽는데 요즘 젊은 여성 작가들 글 읽는 것 같은 느낌인 거야. 아니 무슨 소설 읽는 거 같더라고. 쉽게 잘 읽히면서 난 너무 좋던데?”
2024년 4월 19일. 엄마의 열다섯 번째 기일에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피드를 보고는 주영이가 한 말이었다. 과자를 까먹으며 심드렁한 사람처럼 무심하게 내뱉은 주영이의 말에 내 안에 꺼져 있던 스위치가 켜졌다.
‘은숙아, 우리 은숙이는 글을 참 잘 쓰니까 국문과에도 한 번 지원해보는 게 어떨까 싶네~.’
‘야 은숙아, 너 진짜 잘 쓴다니까. 꾸준히 쓰고 진짜 출판 한 번 고려해봐~.’
‘옛날이랑 비교했을 때 글이 뭔가 정돈되고 담백해진 것 같아. 언젠가 넌 파주 출판 단지를 오가면서 일을 할 것 같아.’
교회 앞 마당에서 내 손을 잡고 말씀하시던 윤정순 권사님, 쓰기에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목소리 톤을 가다듬고 격려해주던 원희 언니,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내 글을 읽어온 1호 독자 은혜가 해준 말들. 마음에 볼이 있다면 그때마다 내 마음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졌을 게 분명하다. 주영이의 말을 들었을 때 아주 오래간만에 잘 익은 복숭아처럼 마음이 발그레지는 것 같았다. 시장에서 사온 깻잎을 씻을 때도, 아침 도시락을 쌀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도 두고두고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아, 스스로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 것 같아.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칭찬과 인정, 그리고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인정과 수긍. 나는 나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