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51분. 눈 뜨자마자 제일 먼저 운동복으로 갈아 입었다. 동생이 생일 선물로 사준 운동복 세트로 환복한 후 이만 닦고 마스크와 에어팟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기상부터 외출까지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거울도 안 보고 지갑도 챙기지 않은 채 ‘후디딤’ 밖으로 나온 이유, 달려야 했다. 어젯밤 입이 터져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밤뿐만은 아니다. 어제는 아침부터 입이 터졌다. 아침을 시작으로 점층적으로 터져서 밤에 피크를 찍었을 뿐이다.
어제는 일어나자마자 밥이 먹고 싶었다. 밥! 눈 뜨자마자 갓 지은 밥이 생각난 것이다. 골고루 영양 섭취가 가능한 식사를 하고 싶지만 조리 과정은 최최최소화하고 싶은 나는 뜨거운 물만 부으면 뜨끈한 밥이 완성되는 오트밀이나 에어프라이어에 돌리기만 하면 금세 파삭해지는 통밀빵으로 탄수화물을 섭취한다. 사먹는 밥보다 직접 해먹는 밥을 선호하고, 다양한 맛을 추구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단순한 식단을 반복하는 게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끔, 어제 아침처럼 특정한 음식이 당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꼭 그 음식을 먹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음식 생각이 나고, 먹을 때까지 음식 생각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현미쌀을 안쳤다. 아주 오랜만에 밥을 지었다. 밥이 될 동안 출근 준비를 했고, 다 된 밥을 밥그릇에 퍼 담았다. 두부와 상추를 가득 넣고, 스리라차 소스와 참기름, 통깨를 넣어 비볐다. 비빔밥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이보다 만족스러운 금요일 아침은 있을 수 없겠는데?’ 싶었다. 첫 숟갈부터 마지막 숟갈까지 한 입 한 입이 황홀해서 입에 욱여 넣고 싶었다. 점심 도시락을 동일 메뉴로 준비해서 출근했다. ‘오늘은 건강한 현미밥 데이가 되겠군!’ 건강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산뜻하게 출근길을 나섰는데 오산이었다. 밀가루의 날을 보내버렸으니까.
출근길, 두둑한 포만감이 쉽사리 꺼질 기세가 아니었다. ‘오늘 아침은 커피를 건너 뛰어야겠는데?’라고 생각하며 사무실에 들어섰는데 동료가 커피를 내리면서 그릇에 빵을 담고 있었다. ‘맞다, 오늘 드립데이구나.’ 한달 전 즈음부터 커피를 좋아하는 동료가 금요일을 일명 ‘드립데이’로 정하고는 직접 커피를 내려줬고, 가끔 빵도 준비해줬다.(일도 잘하고 친절하기까지 한데 커피도 내려주고 빵도 준비해주는 매우 좋은 동료다.)
비빔밥이 소화되려면 한참 남았지만 눈앞의 커피번과 크루아상, 방금 내린 커피를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시도라도 해 볼 수 있었겠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우와, 빵 맛있겠다!”하면서 커피번을 집어 들었다. ‘생리 중’이라는 세 글자는 관대한 면죄부가 되어 준다. 아무리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괜찮아. 더 더 먹어도 돼!’하며 폭주하는 식욕이라는 전차에 기름을 붓는달까. 음식은 음식을 부르고, 포만감은 포만감을 부른다. 점심 식사 때까지 다른 간식을 먹지 않았지만, 점심 식사를 마치자 슬금슬금 입맛이 당겨서 견과류도 먹고, 초코볼도 먹고, 비타민 젤리도 먹었다.
평소 퇴근길이라면 배가 고파서 ‘빨리 가서 밥 먹어야지. 빨리 가서 밥 먹어야지.’ 생각하면서 걸음을 재촉하는데 도무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침의 포만감이 하루종일 그대로 유지되는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홍제천이라도 한 판 뛰고 와야 겨우 저녁 먹을 위장이 될 것 같았지만 홍제천을 뛰러 갈 수 없었다. 저녁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녁 메뉴는 포만감의 끝판왕 피자!
‘몰라 몰라 먹어 먹어!’ 친구와 신나게 피자를 먹었다. 손바닥 한 개 반 정도 크기의 피자를 세조각이나 먹었다. (맥주는 참았다.) 피자를 먹으면서 쉼없이 떠들었고, 피자를 먹고 나서도 쉼없이 떠들고 한참을 걸었는데도 배부른 감각은 도무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창가에 비친 나를 보면서 하루를 반추했다. ‘어우 배불러. 현미밥은 시작일 뿐 오늘 밀가루를 너무 많이 먹었네. 이 정도면 배불러서 못 자겠는데? 조금이라도 달려서 배 좀 꺼트리고 자야겠어.’ 그렇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뛰러 나가자고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한 것은 주먹만한 슈크림맛 빵 먹기, 그리고 주먹 두개만한 말차크림맛 빵 먹기, 그리고 잠들기. 배불러서 못 자기는 개뿔, 아주 잘 자버렸다.
눈이 번쩍 떠졌다. 잘 잔 탓에 밍기적거리는 것 없이 말끔하게 몸을 일으켰다. 자기 직전까지 위장에 밀가루를 밀어 넣은 것 치고는 속도 더부룩하지 않았다. 오직 이 생각뿐이었다. ‘괜찮아. 아침에 뛰면 글루코겐이 지방으로 저장되기 전에 분해할 수 있어. 오늘 아침이 골든타임이야!’
아침 열 시. 이미 쨍하니 해가 나온 터라 과연 뛸 수 있을까 걱정하며 홍제천에 나갔는데, 다행히 원래 달리던 길 반대편이 온통 그늘이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 달리기 어플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서 달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전날 많이 먹어서인지 몸이 무거웠다. 뉴진스 노래가 채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다리의 무거움과 숨가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좀 힘든데? 그냥 빨리 걷기 할까? 빨리 걷기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유혹이 스멀스멀 차오를 즈음 어젯밤 먹은 녹색의 말차맛 크림빵이 생각났다. 그리고 마치 만화처럼 크림빵이 말했다.
“어허! 어제의 밀가루를 동력 삼아 오늘을 달립니다!!”
분명 크림빵이었다. 어젯밤 부드러웠던 크림빵과는 새삼 다른 단호함이었지만, 아무튼 분명 크림빵이었다. 그러자 빠르게 걷자고 속삭이는 약한 생각이 쏙 사라져버렸다. 오직 ‘골.든.타.임.골.든.타.임’ 한 발에 한 글자씩 속으로 외치며 발을 내딛게 될 뿐이었다. ‘그래, 골든타임만 사수하면 돼. 빵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 앞으로 빵을 먹을 때마다 생각해야겠다.
어제의 밀가루를 동력 삼아 오늘을 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