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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숙 May 07. 2024

은숙이의 31번째 어린이날 일기

2024년 5월 5일 (일) 날씨 ☔️


“애기들 속상해서 어쩌냐? 또 비가 와 또 또…”

 천호역 출구를 빠져나오면서 은혜가 말했다. 4년째 어린이 날만 되면 비가 오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이다. 비 때문에 입고 싶은 옷을 입지 못해서, 생각보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우산 안으로 들이쳐서 심술이 난 나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포인트였다. ‘아 그렇지? 오늘 어린이날이지?’



 오래간만에, 그러니까 올해 들어 처음으로 푸르른 교회에 가는 날이다. 그 사이 교회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를 갔다. 매 주일마다 강남역에 위치한 공용 공간을 단 시간 빌리던 것에서 천호역에 위치한 아담한 공간의 주인으로(정확히는 세입자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어엿한 간판도 있었다. (새싹과 십자가 같기도, 손바닥 위 십자가 같기도, 그렇지만 디자이너의 의도는) 방주와 나무를 상징하는 심플하고 푸르른 로고가 그려진 간판 걸린 외관을 보니 “우와!”하는 반가움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푸르른교회 로고

 예배 시간보다 이르게 은혜를 만나 교회 근처에서 밥을 먹고는 커피 한 잔을 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은혜에게 ‘마지막선물ver.찐찐찐최종’을 전했다. 손바닥만하게 접힌 주황색 장바구니 앞에서 은혜는 10년간 보여준 그 어떤 리액션 보다 가장 크고 반가운 리액션을 보여줬다. 은혜의 준비물 목록 맨 아랫칸에 적혀 있는 걸 내가 맞출 줄이야. 상대방 취향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내 취향을 한껏 반영한 선물로 친구를 난감하게 해온 시절이 9년 반쯤 된 것 같은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강산이 아니라 내가 변했나보다. 뿌듯함에 어깨를 으쓱이면서 커피를 마시는데 창밖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우리를 보고 웃으며 다가왔다.


“어? 안녕하세요!”


 목사님, 목사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1, 사모님, 사모님 옆에 (정확히는 발 아래) 나란히 우산을 쓰고 있는 어린이2. 목사님 가정이었다. 바깥은 분명 거무죽죽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네 사람의 얼굴은 마치 환하고 커다란 쌍무지개를 본 것처럼 신이 나 보였다. 특히 우산을 쓴 어린이2 슬이의 신난 표정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우비에 장화, 우산까지 완전 무장을 하고서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드는 슬이, 엄마의 골반 높이 보다도 작으면서 힘차게 환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슬이는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한 번에 홀려버렸다. 늑대의 유혹에서 강동원이 등장하는 우산씬보다 임팩트 있는 등장씬이었다.



 슬슬 커피타임을 마무리하고 교회로 올라갔다. 예배당에 들어서니 스멀스멀 긴장감이 느껴졌다. 왜냐하면 예배가 끝나면 은혜를 내년에야 볼 수가 있으니까. 오늘은 출국을 앞둔 은혜의 파송식과 같은 날이다. ‘마지막’에 몰입해버리면 감정이 끝없이 축축해지고 스스로 보기에도, 은혜가 보기에도 영 멋있지 않은 모습이 연출될 것 같아서 속으로 몇 번이고 생각했다. ‘못나지지 말자! 오늘 기분 좋게 예배드리고 기분 좋게 은혜랑 인사하자!’

 ‘울적해지거나 울기라도 하면 어쩌지?’하고 걱정한 게 무색하게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없었다. 바로 어린이들! 내 마음을 훔쳐간 어린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 한쪽 구석에 마련된 어린이 공간에 자기만의 자그마한 오렌지색 텐트를 짓고는 고 안에서 고개를 빼꼼빼꼼하다가, 텐트를 들락날락하면서 이모들을 탐색하는 슬이와 맑은 침을 흘릴락 말락, 웃을락 말락하며 도통 은혜 품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재이. 어린이들을 두고 내 기분, 감정 같은 것에 매몰될 수는 없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 계속해서 어린이 주변을 맴돌며 시간을 보냈다.


 예배 시간이 가까워져 자리에 착석했다. 고요한 찬양이 흘렀다. 어린이들과 놀던 호흡을 고르고 두 눈을 감자 다시금 긴장감과 함께 어떤 슬픔이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하나님, 제게 어떤 말씀이 필요한가요? 저는 무엇이 슬프고 무엇이 무서운가요? 제가 들어야 할 말이 있다면, 듣게 하소서.’ 노트에 짧은 기도문을 적었다.



 설교는 ‘잔치’에 관한 말씀이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 ‘가나의 혼인잔치’.

유대 사회 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도주였다. 포도주가 영 별로면 잔치는 좋지 못한 평을 받았고, 포도주가 똑 떨어지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잔치는 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과 마리아가 참여한 잔치에 포도주가 똑 떨어지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두 사람 과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잔치가 물로 끝나는 걸 두고볼 수 없었는지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고,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넘치게 하셨다. 모자의 합작이 골로 갈 뻔한 잔치를 잔치 다운 잔치로 이끌었다.

 포도주가 떨어진 가나의 혼인잔치는 우리의 인생을 비유한다. 본디 ‘잔치’란 구원과 같다. 우리의 구원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잔치로 시작되어 영원한 잔치에 이르는 것인데,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네 인생은 마치 포도주가 똑 떨어진 가나의 혼인잔치와도 같아서 잔치가 끝날지도 모를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괜찮다.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앙리마티스 <춤>

 잔치가 끝나버릴 것을 안타까이 여기며 도움을 청한 마리아가 있고, 우리의 잔치가 끝나지 않도록 포도주를 채워주시는 예수님이 계시다. 예수님이 채워주시는 포도주는 동나지 않는 포도주이다.

 목사님은 예배를 열며 말씀하셨다. 한 성도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여는 축하를, 한 성도가 삶의 지경을 넓혀가는 것에 대한 감사를, 각 자리에서 열심히 살다가 기쁘게 다시 만날 것에 대한 소망을 말이다. 한 사람을 떠나 보내며 슬픔이 아닌 유쾌함을, 비장함이 아닌 잔치를 이야기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진심인가. (교회 성도가 다섯 명 정도 되는 작은 개척 교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빛나는 축복처럼 느껴졌다.)

 잔치의 마무리는 성찬으로, 그리고 성찬 후 풍성한 족발 교제로 이어졌다. 목사님 가정과 teenager, 그리고 나와 은혜 총 일곱 명이 함께한 작은 교제였지만 음식도, 웃음소리도, 소음도, 정신없음도 충만한 풍성한 교제였다.



 족발을 먹으려는데 맞은 편에 앉은 슬이가 주보 뒷면에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라고 쓰고 낙서라고 읽는다) 있었다. 다 그리고는(낙서하고는) 길게 빼빼로 모양으로 돌돌돌돌 말아 접어 헌금 봉투에 넣더니 엄마를 통해 매우 슈퍼 샤이하게 그건을 나에게 전해줬다.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슬이의 진짜 모습을 말이다. 슬이가 슈퍼 샤이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슬이는 뉴진스의 슈퍼 샤이 안무를 삼십 번쯤은 스트레이트로 출 수 있을 것만 같은 에너자이저였다!

케이크를 부는 은혜, 그 옆에 낙서 중인 슬이

 족발을 먹고, 은혜의 파송 케이크를 불고, 에그타르트를 먹은 후 슬이의 놀이공간에서 둘이서 놀았다. 슬이는 말을 참 잘했다. 보통 아이들이 하는 말은 발음 측면에서나 논리 측면에서나 100% 알아듣기가 힘들어서 “그랬어? 그랬구나!”라고 얼버무리며 알아들은 척하기 마련인데 슬이 말은 그렇지 않았다. 장난감을 소개할 때도, 병원 놀이를 할 때도, 텐트 사용법을 알려줄 때도, 좋아하는 꽃에 대해서 말할 때도, 스스로 만든 게임을 설명할 때도 슬이는 명료했다.

 슬이는 힘도 셌다. 놀이공간 벽면을 잡고는 두 다리를 떼어 매달리기도 했고, 텐트를 무너뜨리는 시도를 하기도 했고, 한 발 뛰기도 했다. 말을 하고 움직이고 말을 하고 움직여도 슬이는 지칠 줄을 몰랐다. 어쩌면 요근래 달리기를 꾸준히 해 온 것은, 더구나 어제는 아침 저녁 연달아 달리기를 한 것은 오늘 슬이와의 시간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이와 노는 것은 상당한 체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놀았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슬이와 노는 동안 은혜는 슬이 동생 재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크서클이 광대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재이는 당분간 은혜를 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은혜 품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 그래도 그렇지, 은혜는 야근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우리 집에 왔을 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혜를 따라 집에 갈 채비를 했다. 우리가 갈 채비를 하자 슬이의 온도가 바뀌었다. 은혜와 헤어질 때마다 내가 내뿜는 슬픔이의 기운이 슬이에게서 느껴졌다. (슬이 혹시 가슴형이니? 에너지는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모두와 인사를 하고는 은혜와 천호역 벤치에서 앉았다.


“좀 쉬자. 너도 좀 쉬어야겠어. 너도 다크서클 지금 장난 아니야.”

 은혜는 말과 동시에 벤치에 털썩 주저 앉더니 저혈압이 왔는지 사탕을 찾았다. 20-30분 앉아 있었을까? 마지막이고 뭐고 일단 충전이 필요했다. 슬플 줄 알았던 이별의 순간을 이렇게나 녹초가 된 채 맞게 될 줄이야. 생각과 너무 다른 그림이 황당하고 웃겼다. 우리는 별 말 없이 벤치에 앉아서 쉬다가 은혜 열차 시간이 되어 헤어졌다. 지친 듯 8호선 열차에 몸을 싣는 게 올해 보는 은혜의 마지막 모습이 될 터였다.



 은혜를 보내고 집으로 오는 길, 2호선 열차에 앉아 슬이가 준 봉투를 열어보았다. 명료하기 그지 없는 슬이의 말과 달리 하나도 알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낙서였다. 슬이는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 어떤 작품세계를 낙서에 아니 작품에 담은 것일까?

  슬이의 작품세계를 영영 알 수는 없겠지만(왜냐하면 슬이 자신도 절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슬이가 내게 준 환대는 알 수 있다. 슬이가 베푼 환대에 대해 생각했다. 바라는 것 없이 주는 어린이의 환대. 덕분에 긴장없이, 계산없이 나도 한 명의 어린이가 되어 슬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슬이가 아니었으면 오늘이 조금 슬펐을지도 모른다. 은혜에게 멋없는 2023 마지막 모습을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슬이가 한번 더 고마웠다.

슬이가 전해준 작품

 8호선 열차에 몸을 싣기 전 은혜가 말했었다. “가끔 푸르른 교회 한번씩 들러줘.”

 은혜가 돌아올 때까지는 푸르른 교회에 못 올 게 내심 아쉬웠는데 상황이 허락된다면 은혜 없이도 방문해볼까 하는 용기가 생겼다. 무해한 환대, 말 그대로의 ‘기쁠 환(歡) 기다릴 대(待),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이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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