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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Feb 01. 2022

이동갈비의 기원을 찾아서

Origin of Idong-galbi


나는 포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외부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포천 하면 포천 막걸리나 이동갈비로 동네를 인식하고 있고 실제 각종 포털사이트의 연관검색어나 검색순위에서도 포천과 갈비는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이동갈비에 대한 기원과 썰들은 셀 수 없이 다양함이 존재하지만 나는 오늘 말 많고 논란 많은 이동갈비의 이 거대한 흐름을 한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이동갈비에 대한 또 다른 기억

역시 포천에서 나고 자란 나의 아버지 역시 이동갈비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아버지가 중학생 때인 70년대 언저리에도 분명히 이동에 갈빗집들은 성업 중이었으며 아버지는 갈빗집 아들들과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재미났던 건 국민학생 때 포천으로 처음 이사 온, 갈빗집을 인수한 아버지 유년시절 친구네는 가게에 있는 모든 집기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이동 갈빗집을 인수했다는 것이고 고등학교 때 포천을 떠나면서 같은 조건으로 그 갈빗집을 팔고 갔다고 했다 요즘 주식으로 치면 상한가에 사서 다시 상한가에 팔고 갔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실제로 이동에는 주인이 두 번 세 번 바뀐 집이 허다하다 아무리 찾아봐도 망했다는 갈빗집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2. 이동갈비의 시작은 소인가 돼지인가

우리나라에서 수입 소고기가 정식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들여오기 시작한 건 90년대 초반이다 그렇다고 별다른 도축장이나 축산 관련 물류시설이 있을리 만무했던 경기도 포천 변방, 그것도 이동에서(심지어 이동은 1954년까지 강원도였다) 고급 축산물인 이동갈비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은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다. 인프라 낙후의 문제는 소와 돼지를 가리지 않고 그냥 아무것도 없던 동네였기 때문에 지금 소였으면 그때도 소였을 것이라는 가설이 되려 설득력을 갖는다. 돼지고기를 잘 먹다가 갑자기 소고기로 갈아탈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3. 운과 때를 만나야 모든 게 널리 퍼지기 마련이다

경기도 변방. 포천에서 발원한 고기 요리가 전국을 뒤흔드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것이다 이 기원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썰들과 그 파훼법마저 인터넷에 돌고 있으나 나는 이것을 의정부 부대찌개급으로 주한미군이 남긴 유산의 씨앗으로 가정하고 이동갈비의 기원을 다시금 정리해보고자 한다 


기-주한미군 7사단 1 여단 캠프 카이저/주둔지 운천(이동과의 거리 15KM)

앞서 언급했듯 한국전쟁 이후 다른 지자체보다 유독 가난했던 포천에서 고기 요리가 시작될 합당한 기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가축을 키우는 곳도 없었고 여건도 안됐으며 도축이나 유통시설 역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미군을 여기에 넣는다면 잃어버린 퍼즐을 맞추는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닉슨 독트린 발효 직후인 71년까지 주한미군 7사단은 포천을 포함한 중부전선을 책임구역으로 주둔했었고 특히 영북면과 이동면 일대에 주둔한 것이 지금도 확인된다 전체 주둔 규모는 약 2만 명에 달하는데 여기에 일명 여우고개로 알려진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동과 운천의 교통로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그 '밑고기'의 고향이 주한미군 7사단으로 인식해도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승-이동도 일동도 원래 군인이 많은 지역 

이동은 지금도 군인이 많다 포천이 전방은 전방인데 바로 앞줄이 아니라 한 줄 뒤 2 열이다 전방부대와 예비사단, 보급 지원부대의  휴식처가 되었다 이동도 당연 그 중심이며 8사단, 3사단, 27사단, 5군단 , 그 외 예하부대들로 지금도 지역주민들보다 군인 인구가 훨씬 많은 동네다 모여있는 군인들은 일정한 특정 소비패턴을 가지게 되는데 가장 유추해내기 쉬운 게 저렴한 술과 안주다 군인을 상대하기 위한 저렴한 안주와 저렴한 술 이것이 우리가 이동갈비의 또다른 씨앗, 그 다음을 추론하는 또 하나의 그럴듯한 이론(썰)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동갈비의 기원은 원래 불고기집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원래 불고기는 소의 앞다리살과 엉덩이살로 만든다 살짝 얼린 고기를 얇게 저며 양념을 통해 고기를 부드럽게 하고 연탄 불맛을 입혀 불고기 요리로 완성시키는 것이다 고기에 양념을 해야 보관이 길어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요소가 분명했다 서양에서 엉덩이살과 앞다리살 일부로 스테이크를 만들지만 전쟁 직후 보급이 가장 좋았을 미군이 엉덩이 살과 앞다리살에 큰 집착을 보였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으며 양념 불고기의 기원을 나는 여기에서 찾고자 한다 


전- 언젠가 한번 갈비가 이동에 왔을 것이다

그 옛날 이동은 군인도 많았고 술과 안주에 대한 수요도 지속적이었을것이며 앞다리와 엉덩이살로 만든 불고기가 지속적으로 이동에 공급되면서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때, 미군들도 귀하다고 생각하는 갈비 부위가 대규모로 이곳 '이동'으로 넘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고기집 사장님은 고민을 했을게 분명하다 '어떻게 하면 이 갈빗대를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갈빗대에 남은 살 일부에 요지(이쑤시개)로 다른 부위의 살을 덧대고 이어 붙이니 그럴듯한 갈비가 되었다 불고기 양념을 조금 더 세게 했고 덧댄 살에 양념을 하게 되니 아무도 그 맛과 양에 불평을 제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연탄불에 굽는 술안주 소고기는 미디움 레어로 먹는다 


결- 양념은 큰 차이가 없다 

불고기 양념 레시피와 이동갈비 양념 레시피는 큰 차이가 없다 불고기 양념이 얇은 고기를 위해 살짝 가벼운 기분이 있다면 이동갈비는 두꺼운 고기를 위해 조금 무거운 느낌이 있는 것이다 생갈비보다 양념이 비싼 이유는 양념갈비가 보관이 더 오래가능하고 자투리 고기를 붙여도 일반인은 전혀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동갈비는 고기에 양념 배듯 포천으로 배어들어갔고 대한민국으로 배어들어갔다




생갈비. 마블링이 찢겨진 모양을 찬찬히 머릿속으로 붙여보면 붙이지 않은 이동갈비1 임을 알수있다




4. 폭발


60년대 공무원들의 최고 인기 뇌물은 소갈비였다 소갈비 한두근 썰어주는 것이 아니라 한 짝 두 짝 이렇게 아예 짝 단위로 뇌물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소갈비를 우리나라에서는 참 귀하게 생각했다 농경사회에서 소는 농사를 위한 자산이지 식용 목적이 아니었다 서민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리그의 성격이 강했다 성균관의 유생들 정도나 되어야 나라에서 내려주는 소고기를 맛볼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소고기, 특히 갈비의 귀중함은 글로 적기가 어려울 정도다 


71년에 인근 미군은 철수를 했지만 고기 수급에는 큰 문제가 없게 되었다 이미 요지로 이어 붙인 이동갈비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누구나 이동에 오면 저렴한 가격에 충분한 양의 소갈비를 먹을 수 있었다 만원이 작은 돈은 아니었는데 만원이면 갈비를 열대줬다고 했다 이때는 요지로 대놓고 붙인 티가 났으니까 아무도 고급 요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냥 '싸고 양 많은 소고기 정도로 생각하고 먹었다' 어디 부위를 붙이던 양념하고 칼집 내서 며칠 재면 백종원 할아비가 와도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사회적 인식이 그랬다 이 당시 주요 이동갈비의 소비층은 중상류 면회객과 직업군인, 포천 인근 자차를 소유한 소수의 마이카 족이 주류를 이뤘다


80년대 전두환 정부에 들어서면서 눈부신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마이카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갈비를 종업원이 구워주는 가든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전국 어디든 '맛집'이 있으면 무조건 가고야 마는 한국인의 맛집 탐방 문화도 이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차도 있고 돈도 있고 시간도 있으니 이제 그 귀한 소갈비를 먹으러 가기만 하면 되었다 요지로 보기 흉하게 붙이던 갈비도 이제 계란 흰자를 이용한 식용 접착제로 붙여서 생갈비가 아니면 붙인 고기 티도 잘나지 않았다 스리슬쩍 '붙인 고기' 이동갈비는 이동 '통갈비로' 이미지가 탈바꿈되기 시작했다 누구도 말릴 이유가 없었고 말릴 필요도 없었다 이때도 진짜 부자는 이와 중에도 안 붙인 고기(이동갈비1)를 찾아서 먹으러 다녔고 한우를 찾기 시작했지만 이동갈비는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소비문화의 중심으로 오게 되었다 


90년대 들어서부터 이동갈비는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수도권 근교에서 맑은 계곡에 발을 담그고 소갈비를 구워 먹는 조선시대 양반들이나 누리던 고급진 문화를 이제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게 되었다 맑은 계곡에 발 담그는 것도 좋은데 기름진 소갈비는 또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다 국가 경제는 한없이 풍요로웠고 지역경제는 이동갈비 산업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더욱이 수입소 규제 자율화가 되면서 소고기의 채널이 더욱더 다양해졌다 그전까지 공식적인 수입소에 붙던 세배의 보호관세가 무역규제 철폐로 다 사라졌다 미국소 호주 소 뉴질랜드 소 국가를 가리지 않고 소들이 이동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5. 한박자 천천히

IMF 이후에도 이동갈비는 시장규모를 줄이지 않았다 주말이 되면 거리에 불돌이 아르바이트들은  직선화 되어있는 이동 시내를 지나가는 차들을 대상으로 호객행위를 했었고 손님이 오면 바로 숯불에 불을 피워 손님 상으로 배달했다 지역사회 학생들은 서빙을 하거나 고기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지역경제가 갈비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2천 년대 초반에도 이동갈비 업계에서 흔히 들리는 말이 있었는데 여름에는 오후 세시에 장사를 마감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보조 냉장고까지 고기를 준비해두지만 이미 수많은 손님들이 그 갈비를 다 먹고 더 이상 팔 갈비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주말 하루에 만명 단위의 손님이 갈비를 위해 이동을 찾았다 그때는 그랬다 


소를 잡으면 갈비는 도대체 얼마나 나올까? 소 한 마리를 잡으면 순수한 갈비는 양쪽에 한 짝식 두 짝이 나온다 그뿐이다 소의 전체 무게에서 10%를 절대 넘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버블경제 일본의 돼지 사육 전진기지로서 삼겹살이 서민들의 자연스러운 음식 사회문화가 되었지만(일본에서는 삼겹살에 대한 호감이 적어 한국에 남게 되어 자연스럽게 한국 식문화에 합류) 반대로 갈비만을 고집하는 우리 문화에서는 결국 갈빗살 이외의 살을 갈빗대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갈비가 없어서 못 파는 지경에 지금 파는 갈비가 순수하게 통으로 오려낸 갈비인지 다이아몬드 컷팅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붙여서 말고 양념을 붓고 이틀이면 모든 게 끝났다


2010년 원산지 표기법이 공식적으로 실시되기까지 업주들은 식당에서 고기의 원산지를 표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동갈비는 정확히 원산지 표기보다 부위에 대한 설명이 중요했지만 우리의 법은 아직도 이걸 명확히 정리하지 않고 있다 어쨌든 이동에 사람들이 더더욱 많이 찾게 되었고 '가든'의 시설은 점점 거대하고 아름다워졌으며 붙인 갈비는 전문가가 아니면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붙인 갈비 이동갈비는 과거 연탄불에 이쑤시개 꼽아서 늘린 양으로 승부했던 싸구려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탈피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음식이 되었다 




양념갈비. 최근 양념은 덜달고 덜 자극적인 방향으로 선회하였으며 붙이지않은 이동갈비1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있다 결국은 돈문제 아니던가




6. 이동갈비 소송전

2006년 이동에서는 의미 있는 재판의 결과가 나왔다 2003년 광우병 파동으로 미국산 갈비의 수입이 급감하였고 호주산 갈비가 그 빈자리를 대체하였는데 호주는 미국과 그 '컷팅'방법이 달랐다 갈빗갈을 따로 파는 호주산 갈빗대는 갈빗살의 양이 워낙 적었고 미국산보다 비육기간이 적어 붙이고 안 붙이고의 선택의 여지없이 무조건 붙여야만 팔수있는 상품의 갈비가 되었다 업자는 이때부터 갈비에도 차등정책을 두기로 했는데 완전 통갈비(안 붙인) 갈비는 이동갈비1이 되고 미국 뼈에 다른 갈빗살을 붙이면 이동갈비2 가되었으며 호주 뼈에 아무 고기나 붙이면 이동갈비3이 되어 수백억의 매출을 올렸다 


포천의 담당은 의정부검찰청인데 서울검찰청에서 이 사건을 맡았다 감히 영감님 즐겨 드시던 갈비에 장난을 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되는 셈이었는데 대법원까지 간 소송전에서 대법원은 업자의 손을 들어줬다 "갈빗대에 갈비 부근 살을 붙이면 갈비"라는 이동갈비의 기원과 관례를 인정해 준 셈이 되었다 이동갈비의 기원을 모르던 소비자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TV는 특집 다큐를 편성해서 이동갈비 붙이기를 까내렸지만 원래 포천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동갈비는 원래 붙이는 갈비였고 안 붙인 이동갈비1이 특이한 갈비였다 


7. 요즘 이동갈비

요즘 이동갈비는 다시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코로나로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당일 여행지로 포천을 많이 찾게 되고 왔으면 또 갈비를 먹고 간다. 골프를 치러 해외에 나가던 사람들이 해외에 못 가니까 포천에 오고 포천에서 골프 치고 갈비를 먹는다 포천에 와서 갈비를 먹고 갈비를 먹기 위해 포천에 온다  2020 여름 시즌에도 갈비가 모자라서 장사를 일찍 종료하게 된 가게들이 속출할 정도로 업계는 코로나와 무관하게 호황이었다 


인터넷에는 이동갈비를 치면 연관검색어로 줄줄이 원조를 부르짖는 업체들이 나온다 업계 구력 20년 30년은 명함도 못 내밀게 되는데 내가 아니라 환갑 넘은 우리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잘 나가던 요리가 이동갈비이기 때문에 원조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최근 이동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통갈비인 이동갈비1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으며 간혹 붙인 갈비 이동갈비 2 업체들이 있는데 대부분 가격으로 이 두업체를 구별할 수 있다 또 가게에 직접 물어보면 사장님이 대수롭지않게 붙였는지 아닌지를 알려준다 최근 먹방에 소개된 1987 갈비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문이 어렵지만 그 외 다른 식당은 당일 방문해도 식사에 큰 어려움은 없다 


생갈비가 양념갈비보다 갈비가격이 비싼데 앞서 설명했듯 그 보관기간이 짧기때문이며 보통 갈비를 먹는 방법은 생갈비 먼저먹고 그뒤에 양념을 먹는데 이것은 거의 국룰과도 같으며 양념갈비에 냉면이나 된짱찌개를 먹는게 거의 공식화 되어있다 (배운사람이면 비냉 유치원 야간나왔으면 물냉)


붙이든 안붙이든 붙인걸 알고먹든 모르고먹든 이동갈비는 맛있다 요즘에는 많이먹으라고 고기 양념이 덜 달게 나오는게 트렌드다 그래서 전보다 많이먹을수있다 붙인걸 원래 알았던 나도 돈주고 사먹는다 부자들의 전유물, 계급사회의 전유물 이런거 아니고 그냥 맛있어서 먹는다 집에서 숯불 붙이면 귀찮고 복잡하니까 띵동버튼 누르면 고기날라주는 그 점이 좋아서 먹는다 포천사는 사람은 사실 이동갈비 먹어도 그만 안먹어도 그만인데 다른동네, 서울촌놈들 이따금식 포천오면 손님대접 해줬다는 공식 '의전' 절차로 숯불에 고기구워준다 그래야 그녀석들도 집에가서 이동갈비 먹었다고 자랑할테니까 


지난주에는 할머니 생일이라고 갈비를 먹었고 다음주에는 오랫만에 포천온다는 서울 촌놈때문에 갈비를 먹으러 간다 갈비가 그렇다 포천사람한테는 


포천 이동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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