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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Feb 15. 2022

오늘의 민원

ENTP 8W7 A형은 어떻게 화를 낼까


할머니랑 점심을 먹었다. 뭐 대단한 걸 먹은 건 아니고 짜장면에 탕수육을 먹었는데 내일모레 마흔이 되는 손자도 똥개라고 불러주는 할머니와 고양이가 물어주고 핥아주는 내 새끼 우쭈쭈 느낌의 즐거운 한때 같은 거였다. 할머니는 코로나로 영업이 중단된 경로당에 못 가고 또 교회에 못 가니까 부쩍 외로움을 타시는 것 같았는데 그래서인지 평소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내가 한국에 없던 3개월 전 생긴 일을 설명해주었다 


무슨 대단한 이야기의 시작은 아니고 팔십 후반의 할머니가. 그 연세면 누구나 다 있다는 지체장애 4급인 할머니가 육 개월인가에 한번 준다는 쓰레기봉투를 받으러 면사무소엘 갔다고 했다. 걷기에는 애매하고 버스는 한정거장이 채 안되고 택시를 부르기에는 또 애매한 이 거리를. 할머니는 추운 겨울 따스한 날을 골라 마실 삼아 걸었다고 했는데 나는 할머니의 이 '마실'이 얼마나 큰 '도전'인지 국민학생 때부터 10년 주기로 교체했던 할머니의 양쪽 무릎 인공관절 수술과 그 면회와, 그 병원 냄새로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일이 아닌데 그다음이 결정타였다 할머니는 신분증은 가져갔는데 도장을 안 가져갔다고 했고 면사무소 직원은 도장이 없으면 쓰레기봉투를 못준다고 했다 할머니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다시 도장을 가지고 면사무소에 가서 쓰레기봉투를 받았다고 했는데 말끝에 한마디가 나를 후벼 팠다 "요즘에는 이름을 적고들 가져간다는데....."


8W7

이왕 시킨 짜장면이니까 다 먹어야 했다. 남기면 할머니가 싫어한다 또 애니어그램 8번은 보통 뚱땡이가 7번 날개 마른 사람이 9번 날개를 가지게 되는데 나는 8번에 7번 날개. 아무리 열 받아도 짜장면은 짜장면. 탕수육은 조금 늦게 먹어도 안 부는데 짜장면은 늦게 먹으면 분다. 열 받아도 짜장면 먼저 먹어야 된다 우리 동네 중국집 청궁은 단무지가 무척 맛있는 것 같다 


할머니 눈치를 살핀다 8W7. 8번의 더러운 성질을 7의 코믹으로 승화시키는데 진심인 사람. 할머니에게 한겨울에 운동 세게 하셨으니 어땠냐면서 좋지 않았냐고 너스레 한번 떨어준다. 할머니는 멋쩍게 '뭐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할머니를 반드시 웃겨야 했으므로 할머니가 좋아할 만한 드립을 쳐드려야 했다. 경로당 잘생긴 할아버지 드립 한번 치고, 또 있지도 않은, 아는 사람이 소개해준 70 중반의 연하 꽃미남 할아버지 썰로 너스레를 한번 떨었다 나는 고생만 죽어라 한 우리 할머니가 다시 마음고생하는 게 너무 싫었다


A형

지는 싸움을 애초에 하지 않는다. 할머니와는 자연스럽게 헤어진 다음 차에 시동을 걸고 열선을 켰다 차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검색을 한다 몇 년 전부터 서명이 법적 효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공무원과의 말싸움에서는 정확한 법 조항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본인서명 사실 확인 등에 관한 법률'을 찾아내고 한번 죽 읽어본다 '그래 이법이다'


ENTP

열 받은걸 반드시 외향적으로 쏟아내야만 하는 사람이, 그동안의 인생 경험을 통해 할머니에게 반드시 도장이 필요하다고 공무원이 말한 이유에 대해서 예측해보건데, 논리적으로 자신의 게으름을 바탕으로 한 본인의 편의를 위한 결정이었다는 사실이 법률검토(?)를 통해 명확해졌다. 이제는 진실된 방법으로 민원을 넣으러 갈 시간이다 


주차장에 차분히 주차를 한다. 입장을 위한 열체크를 하고 QR을 찍는다. 할머니는 밥 먹으면서 진행된 나의 유도심문에 쓰레기봉투 담당공무원의 특이한 인상착의를 설명해 주었는데 마침 그 사람이 딱 자리에 있었다 시작은 정중하게. 흥분하는 사람이 지는 거니까 예를 갖추어 묻는다 


"안녕하세요 혹시 3개월 전에 할머니께서 쓰레기봉투 수령하시러 오셨었는데 혹시 도장 안 가져 왔다고 돌려보내신 거 기억나세요?"


담당공무원은 짐짓 당황한 듯 말했다 


"쓰레기봉투 수령해가신 분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의 논조는 이름을 알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러 온 건데요 쓰레기봉투 받으러 오는데 도장이 꼭 필요한 건지 확인이요 쓰레기봉투를 받으러 본인이 직접 오는데 꼭 도장이 있어야 하나요?" 차츰 높아지는 목소리톤 


"네 도장이 꼭 필요합니다 도장이 있어야 쓰레기봉투를 드릴 수 있어요" 시골마을 공무원도 내심 짜증 난 듯 목소리가 같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오후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겠지만 넌 지금 걸려든 거라고 


"아니 주무관님 서명 확인법이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나는 지금 당신이 쓰레기봉투를 지급하는데 도장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물어보는 거라니까요? 쓰레기봉투 받는데 왜 도장이 필요한지 규정이나 지침 훈령 이런 거 있으면 보여줘 보세요" 공무원은 당황하며 쓰레기봉투 수불대장을 들고 자리를 일어나 이리저리 왔다 갔다 찾는 척을 시작했다 그런데 누구다 나 안다 이게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그동안 저 공무원에게 당해왔을 다리 아픈 내 할머니와 우리 동네 할머니를 생각하니 갑자기 피가 솟는다


 "이 보세요 주무관님 애초에 그냥 당신의 행정 편의 때문에 그런 거라고 사과하고 우리 할머니 왔다 갔다 한 거 사과하면 끝날 일을 왜 이렇게 구차하게 일을 만듭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네 면장 어딨어 면장 면장 나와봐 잠깐!" 조용했던 시골마을 면사무소에 애초에 말소리라고는 나밖에 없었는데 큰소리가 나기 시작하니까 저 멀리서 듣고 있던 면장님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면장님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노인들 수급자들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게 갑질 아니고 뭐예요 이게 대체? 무슨 행정이 이런식이에요"


면장님은 나에게 응대를 하는 대신 담당 주무관에게 "이름 쓰고 받아가시게 해" 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나랑 상대해봤자 본인은 득이 될 것이 없다는 아.. 갑자기 내가 똥이 되어버린 것인지..피하냐 지금...


"주무관님 빨리 행정처리 그런 식으로 한 거 사과하시고 재발방지 약속하세요"

담당 주무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쭈뼛쭈뼛...

"죄송합니다"

"진심을 담아서 사과해주세요 다음부터 이런 일 안 생긴다고"

"육 개월 뒤에 쓰레기봉투 수령하러 오실 때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40절


가장 작은 이들에게 갑질을 한사람에게 다시 갑질을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쭉 이렇게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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