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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Jan 17. 2023

포카라 48시간

쓸모있는 삶에 대하여

여느 때와 같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날씨는 맑았고 엔진 패러글라이딩이 이른 아침부터 날았다. 엔진 글라이딩이 아침부터 시끄럽게 난다는 건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씨가 맑을 거란 이야기였다. 건강한 뚱땡이가 목표인 나는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했고 카트만두에서 미리 주문한 가래떡을 받으러 산촌다람쥐로 향하는 길이었다. 노점에서 사과를 고르고 있던 형수를 만났는데 대뜸 하는 말이 "비행기 추락했다는데? 들은 거 있어?" 였고 구글에 검색한 포카라 공항 관련 뉴스는 3분 전 업데이트된 '비행기가 추락했으니 후속 기사를 올리겠다'였다. 시즌을 맞아 한국인이 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포카라에서 한국인을 상대할만한 업소 네 곳에 연락해서 오늘 오는 손님을 물어봤으나 네곳 다 없었다. 영사 협력원인 형수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될 일에 대해서 고민했다. 비행기가 추락했으므로 당분간 국내선 이용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카트만두에서 출발한 대사관 영사가 육로로 이곳에 당도하기까지 최소 8시간. 이 8시간 동안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형수가 카트만두 대사관에 연락했을 때 역시 영사도 형수가 먼저 움직여주길 바랐다. 일단 카트만두에서 출발한 영사가 도착하기까지 상황파악이 우선이었다. 그 사이에 탑승자 명단이 떴는데 유 씨 성이 두 명 있었고 한국인 이름을 확인했다. 국적도 한국으로 확인했다. 돌림자가 아니니까 문득 아버지와 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4월에 아버지가 될 예정이므로 마음이 또 한층 무거워졌다. 포카라 트레킹은 보통 에이전씨를 끼고 진행하는데 포카라 에이전씨뿐만 아니라 카트만두 에이전씨도 확인이 안 됐다. 에어인디아를 타고 도착당일 바로 국내선으로 이동했다는 것만 확인됐다. 네팔에 몇 번 와본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다시 온 걸로 추측했다. 탑승번호 67번 68번 마지막 탑승번호. 출발전 가까스로 안타면 좋았을 이 비행기를 탄것같았다.


그사이 실시간으로 사고현장 영상과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는데 상태가 매우 심각했다. 사고지점이 구공항과 신공항 사이 계곡. 맨날 활쏘러 다니던 그 평화로운 계곡이 지금은 비행기가 떨어진 아비규환이 된 것이다. 오토바이에 형수를 태우고 구공항으로 먼저 갔다. 시신을 구공항에 수습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역시 잘못된 정보였다. 다시 신공항에 있는 네팔공항공사에 갔는데 역시 그곳도 마비. 간다키 병원에서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인했다. 며칠 전 동네 동생이 포카라에 왔을 때 포카라 공항 부항장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교환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그녀는 무척 바쁘다고 하고 바로 끊어버렸다.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그럴 만도 했다.


형수를 태우고 다시 간다키 병원으로 향하는데 앰뷸런스들이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는 걸 봐서는 방향이 맞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오열하는 사람들과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이곳이 맞았다. 입구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서 형수친구 국제기구 의사를 만나서 간단한 브리핑을 받았다. 국제기구 의사는 나에게 사진도 몇 장 보여줬는데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처럼 비행기는 추락하자마자 폭발했고 따라서 시신의 손상상태가 상상이상으로 심각했다. 안치소 입구까지 갔는데 시신 확인이 안 된다고 했다.  오전에 사고가 났는데 오후 두 시 반이 지나도록 신원 확인에 대한 지침이나 가이드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인 것으로 하고 병원 인근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하면서 숨을 돌리기로 했다. 카페에서는 선교사 모임이 있었는데 모두가 평화로운 걸로 봐서 오늘 사고를 당한 두 사람은 선교사와 관련이 없는 걸로 생각됐다.


아침 먹고 먹은 게 없어서 커피랑 과자를 먹으려고 했는데 다시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사고자 신원을 확인해 달라는 전화였다. 이곳에는 DNA검사도 안되고 냉장시설도 없기 때문에 상온에 있는 시신은 사고발생 직후부터 부패하고 있었다. 육안 말고는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네팔의 장례문화는 바로 화장하는 게 문화고 또 그 유골을 수습하지 않고 바로 강으로 보내는 게 문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신원확인이 어려울 경우 집단으로 화장할 수도 있다는 고위관계자의 '결심'이 곧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두 명의 한국인 시신만이라도 빨리 신원확인이 되어야 그나마 남은 유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아들이다. 그리고 나는 곧 아버지가 된다. 형수를 봤다 한국 아줌마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 분명했고 지금 포카라에서 누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내가 생각해도 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한국에 뉴스가 보도되었는지 나를 걱정해 주는 여러 지인들로부터 연락이 엄청 오기 시작했다. 나는 무사했지만 무사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였다.


경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통제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신원을 확인하고 통제선 안쪽 안치소 입구로 왔는데 형수보고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내가 안으로 들어갔다. 냉장시설이 없어서 이제야 에어컨을 설치하고 있었다. 실온에 노출된 비행기 추락현장의 시신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많이 고통스러웠다. 살면서 적지 않은 시신을 봤고 이런 것에 익숙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나의 현실은 달랐다. 아버지는 어렵지 않게 찾았다 대사관에서 보내준 사진과 큰 차이가 없었고 유류품에서 한국 전화와 티켓을 발견했다. 시신의 상태가 온전한 편이었고 무엇보다 속옷이 한국에서 입음직한 브랜드였다. 문제는 아들이었는데 사고현장의 시신들의 손상상태가 많이 심했고 또 탑승자들 중에 한국인과 유사하게 생긴 네팔인 구릉족 탑승자가 많았으며 결정적으로 대사관에서 확보하고 있던 사진은 5년 전 사진으로 지금과 많이 달랐다. 안치소에 모여있는 30여 구의 시신을 확인하고 아들에 대한 추가정보를 요청했으나 한국에서 유가족과 바로 소통하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답을 받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비행기 좌석이 바로 옆자리였기 때문에 근처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기체가 두 동강 나면서 수습순서에 문제가 있을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추가로 수습 중인 시신에 아들이 있기를 바라고 현장을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성당에 들러 주일미사를 했다. 프리티비촉 전광판은 추락소식으로 추모의 색으로 바뀌었고 미사에서도 신부님께서 비행기 추락을 언급하면서 희생자를 위한 기도를 했다. 원래는 미사를 마치고 저녁을 먹어야 되는데 도저히 저녁을 먹을 수가 없었다. 수녀님께 양해를 구하고 집으로 왔다. 오래 끊은 담배를 몇 대 피우고 술을 마셨다 술을 먹지 않으면 조금 힘들 것 같았다. 살면서 가끔 힘들 때마다 연락하는 외삼촌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모르고 간 거 아니면 그냥 이겨내라'는 무척 현실적 조언을 받았다. 술 먹다가 형수한테 전화해서 카트만두에서 내려오는 영사가 혹시 신원확인 감당이 안되면 내가 내일 다시 가겠다는 말을 남겼다. 일단 오늘은 술을 많이 마셔야 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여기저기서 연락이 많이 와있었다. 특이한 점은 뉴스에서 군인으로 신원을 알렸다는 점인데 나는 바로 한국에 있는 군인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추가정보를 요청했다. 오분도 안되어 소속부대 지휘관하고 건너 건너 연락이 닿았다. 공무가 아니니까 직접 도와주기는 어려운데 또 같은 부대원으로서 엄청 도와주고 싶어하는걸 느낄수 있었다. 나는 아들이 포경수술을 했는지 확인을 요청했다. 어제 안치소를 나서면서 병원의사에게 포경수술한 10대 중반 남성 시신에 대한 언급을 해뒀다. 한국의 높은 포경수술률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이렇게 손상상태가 심각할 경우 치아를 포함한 신체특징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었다. 두 부자가 출국 전 공항에서 찍은 사진을 부대에서 받아 영사에게 전달하고 한국에서 받은 복장 특장점을 형수한테 전달했는데 영사님이 혼자서 확인을 잘하고 있다고 내가 현장에 안 와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차분히 아들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추스르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마무리가 되나 보다 했는데 아직 이른 시간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이웃에서 트레킹 에이전씨를 하고 있는 현지 지인이었는데 쏘롱라 패스 아래 50미터 지점에서 동사한 사체가 한국인으로 추정된다는 거였다. 쏘롱라높이는 5400미터쯤. 지금 기온은 영하 20도였다. 사실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특히나 지금같이 비행기 사고수습으로 정신없는 상황에 바로 대사관에 연락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사실 확인을 하고 연락해야 맞지 싶었다. 마냥 체크포스트 전화번호를 수배했다. 한참을 걸려서 마냥 체크포스트를 확인했고 1월 10일에 체크포스트를 지나간 에이전씨 없는 한국 여성의 이름과 여권번호를 확인했다. 에이전씨 협회를 통해 이미 마낭부터 한국인 트레커가 혼자 올라간다는 소식은 확보하고 있었지만 전달되기에 조금 더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정리된 정보를 대사관에 전달했다. 또 다른 죽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인의 영상과 사진들이 핸드폰으로 왔는데 매고 있는 가방이 한국 브랜드였다. 한국인이 아니길 내심 바랬지만 역시 한국인으로 확인이 됐다.


점심 지난 오후에 아들도 찾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국에서 출발 전 찍은 사진을 기초로 카트만두에서 오신 영사님이 다섯 시간을 안치소를 뒤졌다고 했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무 잘 알아서 달려가서 술이라도 한잔 따라드리고 싶었다. 커피를 마시며 되려 나에게 고생했다면서 미소로 대해주는 영사님은 찾아서 천만다행이라고 했지만 영사님 몸에서는 불에 탄 시신들의 냄새가 났다. 받은 사진에서 망자는 앞머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현장에서는 머리를 올리고 있었다고 했다. 옷을 일일이 다 벗겨내서 옷에 있는 의류 택의 한글을 통해 신원을 확인했다고 하셨다. 사고기에 외국인이 14명 타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한국대사관만 사고발생 30시간이 안되어 수습을 완료해서 헬기로 카트만두에 보냈다. 두 부자의 상태가 다른 분들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그게 그나마 우리가 공유할수 있는 유일한 위안 거리였다. 이제부터는 유가족이 결정할 문제다. 화장 후 한국으로 갈지 그대로 한국으로 갈지는 경제적 문제라는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것이다.


국제 보험에 가입된 항공사는 2만 불의 보험료를 주는데 세금을 공제하면 만 칠천 달러가 실수령액이 될 거라고 했다. 사람 목숨 값 만 칠천 달러. 아직 공식 사고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사고 다음날부터 국내선 공항은 다시 정상 운항되었다.  2월 초에 애낳으러 한국에 가는 임신한 부인과 2월 중순에 네팔 지방에 출장가는내가 선택할수있는 선택지는 많아 보이지 않는다.


바쁜 이틀이었다. 누군가에 도움이 될수있는 이틀이 되었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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