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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Nov 08. 2023

네팔에서의 삶

오늘도 이렇게 삽니다

1. TV에 나오고 또 그 삶이 멋있어 보였는지 아직까지도 종종 모르는 분들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나는 이민 컨설턴트도 아닌데 나에게 다짜고짜 연락해서는 '네팔에서의 영속적인 삶 찾기' 같은 굉장히 많은 시간과 큰 에너지가 소비되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부탁한다. 최근에는 스님 한 분이 다짜고짜 우리 집에 찾아와서는 네팔에서 살고 싶다고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고 밑도 끝도 없이 인생 스토리의 설법을 시작 하셨다. 나는 이분에게 돈 달라고 한 적도 없고 밥값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돼지고기 가득 들어간 고추장찌개 값으로 오백루피 주셨고 하룻밤 방값으로 천 루피 주셨다. 나는 달라고 한 적도 없고 얼마라고 한 적도 없는 돈을 주셨다. 스님한테 그냥 돼지고기 공양한 걸로 퉁쳐도 되는데..


나는 기본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보를 틀어쥐고 이것이 재산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또 남들과 공유하면 없어지는 지식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해외에 넘쳐나는데 그들이 쥐고 있는 알량한 지식들은 결국 인터넷에 있거나 아니면 현장에 있거나 아무튼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맞닥뜨리게 되는 정보가 대다수이고 몰라도 사는데 지장이 없다. 나는 이들에 대한 '강력한 재수 없음'을 근본으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네팔 내지는 개도국 거주 희망자들에게 짧게는 30분 길게는 아는 범위 내에서 서너 시간까지 무료 상담을 해준다. 그런데 나랑 통화하시는 분들의 준비상태는 너무 실망스럽다.


2. 장인 장모님이 네팔에서 한 달 하고도 스무날을 계시다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두 분이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나와 안사람은 몸살에 걸렸는데 아이가 있으니 마음 편히 몸살을 느낄 새도 없었던 것 같다. 프로젝트 마치고 전문가들이 귀국하는 같은 비행기로 장인 장모님이 네팔에 오셨고 바로 모시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이사 와서 건물의 먼지를 털어내고 아이방과 장인장모님 방을 꾸미면서 또 프로젝트 파견을 마무리하면서 또 대학원 수업을 들었다 바쁘고 힘들다는 말이 차고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잘 버티고 잘 넘겼다.


3. 포카라는 원래 10월이면 날씨가 맑아져야 했는데 10월 끝자락에 와서야 설산이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동네 뒷산으로 자랑하던 안나푸르나 마차푸차레가 이제야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한 건데 그것도 시원하게 보여준 게 아니라 구름 가득 끼고 얄궂게 살짝살짝 보여줬다. 기상이변이 여기도 왔구나 했었는데 10월 중순쯤 건물이 흔들리는 지진이 왔고 11월 초에 또 건물이 흔들리는 지진이 왔다 진원은 포카라에서 200km 떨어진 서쪽. 현지인 200여 명이 죽었다고 했다. 이주간격으로 진도 5점 중반대 지진이 온 건데 나에게 직접 피해는 없지만 지진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세상이 흔들리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히는데 짧은 시간 찾아오는 무력감은 두려움을 넘어서 삶에 대한 초월적인 감정을 안겨줬다. 지구에서 나란 인간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


이렇게 지진이 오면 산에서는 더 위험하다 절개지와 경사면에서 지진이 오면 당연히 산사태가 나는 건데 여기 오래 산 한국인이나 현지인이나 관광업 종사자들의 마인드는 한결같다 "아무 일 없을 것이니까 그냥 가면 된다" 하긴 올라간 사람들이 죽으면 책임질 일도 없을 것이니까. 하루라도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전체여정이 틀어지는 한국인의 K-쪼들린 휴가일정과 더불어 듣기 좋은 안심되는 말들은 지진여부와 상관없이 트레킹 떠나는 사람의 발목을 잡지 못한다. 하루이틀 여진상황 보고 올라가라는 대사관의 안전공지만 허공에 흩뿌려질 뿐이다. 이러다 사고 나면 또다시 시작될 도대체 대사관은 뭐 했나 재외국민 안 지키고 도대체 뭐 했나. 나는 대사관 직원이 아닌데도 숨 막힌다.


4. 살면서 지금처럼 행복한 순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또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를 불행이 두려울 정도로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아이는 무럭무럭 크고 있으며 집에 손님은 없어도 가끔씩 찾아와 주는 지인들과 무척이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아이가 자라는 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이일을 택한 장점이 되는 것 같다.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시간에 대해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욱더 애틋하고 소중하다. 나는 아이가 뒤집는 걸 봤고 기어가는 걸 봤으며 내 손을 잡고 일어서는 걸 봤다. 아이는 100일을 넘겨서 네팔에 왔고 카트만두에서 한 달을 살고 포카라에서 200일을 맞았다. 몸무게가 10킬로에 육박하는 7개월. 건강이 유일한 바람이다.


갑상선과 각종 질병을 통해서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던 나에게 아이가 찾아왔고 새로운 '삶'이라는 희망과 우주를 안겨준 아내와 아이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내 아들은 특히 나랑 손이 많이 닮았다 내가 봐도 새송이 버섯 같은 내손과 똑같이 생겼다. 부모가 되고 보니 부모님에게 죄송스럽다 나도 자라면서 이랬을 텐데 부모 속을 썩인 지나온 과거가 후회스럽고 지금은 작고 귀여운 아들이 나를 닮아 속 썩일까 봐 또 두렵다


5. 포카라는 지금 물이 잘 안 나온다 코로나 때 엄청나게 건물들이 올라갔고 새로운 숙박업소들이 신축되었다. 네팔의 부자들은 코로나를 투자의 기회로 봤던 것이다. 그런데 물과 전기 같은 인프라는 이 건물들의 신축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포카라를 다니다 보면 물차들이 엄청나게 돌아다니는 걸 볼 수 있고 물차들의 물 기지인 제로킬로미터 근처에 물차들이 엄청 몰려있는 걸 볼 수 있다.


우리 집 바로 앞에 큰 호텔이 생겼지만 상수도 관의 증설은 없었고 그래서 우리 집과 우리 위아래집이 물이 잘 안 나온다. 윗집에서 산에다 물을 대서 아랫집들과 물을 나눠썼었는데 이를 질투한 아랫집에서 윗집에 돈을 대고 물을 나눠 쓰기로 하면서 나를 배제하기로 했다고 했다. 나도 돈을 충분히 낼 수 있었고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네팔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국인이 네팔에 사는 게 이런 식이다. 물을 사서 쓰면 나는 많은 돈을 지불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나는 울적한 마음에 기분전환을 위해 마당에서 방글라에서 사 온 소고기 티본스테이크를 굽고 소갈비에 양념을 해서 양념갈비를 구웠다. 힌두국가에서 할 수 있는 소소한 복수 같은 것. 바람 타고 소고기 육향이 너희들 집안에 골고루 두루 전해지기를 바란다.


6.  장모님과 스쿰바시를 돌았다. 아이들에게 사모사라는 튀김 간식 100개를 나눠줬다. 코로나로 이곳을 떠나기 전 그리고 사고 이후 오랜만에 찾은 곳인데 바뀐 것 같으면서도 그대로인 모습이었다. 10년 전에 네 살이었던 비니따가 이제 열네 살이 되어서 학교를 열심히 다니고 있다. 어쩌면 네팔을 떠나게 될지도 모를 요즘 나는 무엇을 네팔에 남기고 가는가 라는 질문에 비니따가 답이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 자라주어서 고마울 따름이다.



7. 한국에 럼프스킨병이 돈다고 뉴스에 떴다. 우간다 있을때 큰 돼지 농장을 경영하시던 한인회장님께서 '여기는 구제역은 없으나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있어서 어려운 부분이 있고 글로벌화 시대에 돼지열병이 한국에 도착하는것은 시간문제일것' 이라면서 주식 사라고 회사까지 찍어줬는데 나는 안사서 그만인게 되었고 이번 한국 럼프스킨병도 네팔에 이 병이 돈다고 8월에 내가 스스로 커뮤니티에 글을 작성했으면서도 이게 한국갈것을 생각을 못해서 상한가 올라가는 주식을 보면서 다시금 깨닫는다. '나는 주식을 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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