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아마겟돈 타임을 보고
최근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아마겟돈 타임"을 봤다. 하나는 재난영화고 하나는 부조리극이다. 전자가 문명의 바닥이 무너지자 야만으로 회귀하는 적나라한 인간군상을 그렸다면, 후자는 소수자(이민자 후세대)인 한 가족(좁게는 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윤리와 도덕을 버리는 이야기다. 왜 그랬는지 다면적으로 그리고 있긴 하지만 둘 다 인간의 추락, 인간성 상실이라는 메세지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공통으로 잡은 설정 중 하나는 좁아지는 세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지진으로 인해 사람이 설 땅 자체가 줄어들었기때문에 만들어지는 스트레스를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또한 그 조건 속에서 추가로 내외부를 규정짓고 타인을 배제함으로써 세계를 더 축소시킨다. 아마겟돈 타임은 아이인 주인공이 적응 문제로 공립학교에서 사립학교로 전학을 간다. 잘사는 백인계층이 다니는 특권사회로의 편입이라는 설정을 통해 무대+인식이 동시에 좁혀진다. 그 과정에서 어울려 놀던 흑인 친구를 배신하고 타자화한다.
세계가 좁아지는 것과 인간성 상실의 연결을 위해 상수 하나를 추가해야할 것 같다.
(인식의)세계가 좁아짐 +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한 분투(상수, 보편적) = 인간성 상실
내 것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때문에 문제되지 않지만, (인식의)세계가 좁아지면 사회적 인간으로써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비극의 공식이 완성되는 것 같다. 내가 속한 세계를 좁히면서 자기고립화를 지속하면 말이다. 유투브 알고리즘 처럼...
같은 아파트인데, lh거지라 구분 짓고
같은 동 주민인데, 저층은 임대주택이라 색을 다르게 하고
현장학습을 안가서 출석을 개근하면 개근거지라 부르고
비슷한 소수자인데 트랜스잰더는 안되고
등등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기 위해 하나하나 따져가며 스스로의 세계를 좁히는 일을 너무도 열심히 하는 것 같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마지막 대사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평범한 일상처럼 느껴진다. 이제 밀실은 너무 많은 것 같다. 광장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