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인문학 강의를 보고
세상이 좀 더 살만해지려면 존재의 "대체 불가능성"을 알면 된대.
오늘 아침 먹으면서 강신주의 인문학 강의를 봤는데 거기서 그러더라고.
자꾸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유도 그런 거지,
나 하나 없어져도 이 세상은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갈 거 같거든.
이 회사에서, 이 부서에서, 이 작품에서, 이 강의실에서, 내가 몸담고 있는 이곳에서
나라는 존재를 언제든 대체 가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힘주고 살아내기 힘들어진대.
"나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고 주문처럼 외우는 거야. 이건 꼭 나라서 할 수 있는 거다.
그게 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나서라기보다는 그냥 나라는 존재는 세상에 유일무이하거든.
이런 얼굴과 목소리로, 이런 생각과 경험과 기억을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거든.
관계도 마찬가지다? 강신주 씨는 관계에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해.
대체 가능한 관계와 대체 불가능한 관계.
예를 들어서 이전까지의 내 연애는 늘 빨리 그리고 쉽게 끝났다고 했잖아. 그 이유 중 하나가 나는 늘 "너랑 헤어지면 난 또 새로운 남자 만나면 돼. 세상에 널린 게 남자야." 하는 생각을 했거든. 그니까 그때 걔네는 나한테 대체 가능한 존재들이었던 거지. 그래서 뭐 하나 마음에 안 들면 그냥 툭툭 끊어버리는 거야.
근데 지금 내 곁에 있는 친구, 애인, 동료들을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대한다면 그렇게 툭툭 끊는 게 가능하냔 말이지. 더 나아가 우리가 함께 사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개개인들을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생각해 준다면
뉴스에 나오는 분통하고 끔찍한 사고들도 있을 수가 없는 거야. 통보 없이 해고시키고, 헤어지자 한다고 죽이고,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전쟁을 일으키고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겠지. 어떻게 해치겠어, 이 세상에 딱 하나뿐인 레어템, 아니 귀한 인간인데.
다시 내 사랑 얘기로 돌아와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 너와 대체 불가능한 인연을 맺었으니 나는 이제 나름의 최선을 다하겠지, 소중하고 귀하게 대해주려고. 근데 나는 네가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되면서 네가 언젠가 나를 대체 가능한 존재로 생각하게 될까 봐 두려워.
여기서 강신주 씨가 또 뭐라고 하냐면, 인연은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사라지기도 하는 거래.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것이 영원한 "지루한 천국"이 아니라 "상냥한 지옥"에 사는 거야.
너무 어렵지 않아? 대체 불가능한 너랑 대체 불가능한 인연을 맺었는데 그게 또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니.
그러면 나는 또 고민을 해. 지옥에 떨어지긴 무서우니까 너 역시 널리고 널린 것들로 대체 가능한 존재라고 생각해버릴까? 사랑이 뭐냐고 나한테 물었지. 나는 아직 그런 걸 잘 몰라서 요즘 사랑처럼 생긴 것들을 수집하고 있어. 내가 오늘 정리한 사랑은 언젠가 상냥한 지옥에 떨어져서 다칠 걸 뻔히 알면서도 대체제를 찾지 않는 거야.
"모든 것이 영원한 천국은 얼마나 지루하겠니.
불변이 없으므로 붙들릴 게 없다.
소유가 없으므로 자유다 안녕!
마지막이란 없다는 것
심지어 나의 죽음 앞에서도
고마워 내 상냥한 지옥, 오늘도 안녕히"
김선우 - 상냥한 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