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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 Apr 24. 2023

짜치는 일

네? 이거 제가 해요?

짜치는 일, 


회사를 다니다 보면 지겹지만 한 번씩 꼭 마주하게 된다. 특히 팀 간 업무 분장이 애매하게 겹치는 경우 이런 일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난다. 나는 오늘 소위, 짜치는 일로 하루를 버렸다. 어쩌다 내가 이 짜치는 업무를 하게 되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나지만 타 팀과 협업을 하며 각자의 업무에 적당한 선을 긋는 것은 저연차인 내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다.



짜치는 일(의미: 쪼들리는 일)은 보통 신입에게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왜인지 나는 구구절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굽실거려야 하는 업무를 떠맡게 되었다. 그 일을 쳐내다가 몇 가지 실수 등으로 팀장님의 신뢰도 약간 잃었고,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다. 말하는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내가 말로 설명하는 것의 중요도가 큰 일에 덜컥 당첨되었으니,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누구나가 싫어하는 일이겠지만 내가 짜치는 일을 싫어하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나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저자세가 디폴트인 나는 내 업무에 대해 "이것은 아닙니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 정도의 짬도 차지 않았을뿐더러, 더러운 꼴 안 보고 내가 좀 더 해주고 말자는 마인드로 살아오기도 했다. 그게 내 삶의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은 결국 내게 더 많은 일거리와 함께 돌아오곤 했지만, 어쨌거나 이건 타고나길 바꾸지 못하는 천성인 것이다. 이런, 젠장. 그래서 짜치는 일을 완수하기 위해 싫은 소리를 장착해야 할 때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둘째, 나는 조직의 생태계 구조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이를 테면, 타 팀을 대하는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 어디까지 내가 이 업무에 대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본능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나는 성향이 무던하고 둔한 데다가 센스가 있는 편도 아니고, 눈치를 많이 본다고는 해도 그만큼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다. 그래서 유독 조직에 들어가면 사람이나 집단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애를 많이 먹는다. 이건 회사에 오래 다니면 점차 나아지는 부분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업무 속에 내동댕이 쳐진 내가 감히 감당하기엔 조금 힘든 점이 있다.





어찌 되었건 위와 같은 이유로 하기 싫은 업무를 떠맡은 후,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물론 센스가 타고났다면 적당히, 유연하게 대처했겠지만)에서 짜치는 일을 하다가 팀장님께 한 소리 들으니 기가 확 죽어버렸다. 팀장님께서 기가 팍 죽은 내 모습을 보고 괜찮다며 배우는 과정이라며 조금의 위로를 덧붙여 주셨지만 이미 멍든 마음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울적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중되었다.


물론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거쳐오긴 했어도, 그나마 일의 끝이 보이기 시작해서 기쁘긴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내 회사생활 앞에 무수히 펼쳐질 것이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심장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렸다. 이럴 때일수록 어쩌라고 마인드로 가야 정신건강에 좋다던데, 입으로만 '어쩌라고,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뻐끔뻐끔 소리 없는 반항을 지르고, 머릿속은 후회와 걱정으로 가득 찬다. 이런 모순된 모습조차 '나'라는 것이 참 우습고 멋지다. 한결같다는 점에서 말이다. 


싫은 소리 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은 자의 말로란 이것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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