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지면서 깨달은 것들
최근 극한호우로 매일같이 장대비가 쏟아졌다. 나는 개인적으로 비 오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축축하고, 짐도 많아지고, 기분도 울적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비를 싫어하는 건 이 때문만은 아니다. 비에 대해 얽힌 나의 비밀(?) 때문이다. 나는 비가 오면 계단을 내려가지 못한다.
시작은 세 달 전쯤이었다. 이 날은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역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집에 가기 위해서는 고가 도로의 육교를 건너야 했다. 육교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려고 했지만 사람이 꽉 차 결국 계단을 택했다. 꽤 높고 구불구불한 계단이라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그러다 갑자기 슉. 발이 미끄러졌다. 분명 밑을 보며 조심조심 가고 있었는데! 4개 정도의 계단을 미끄러지며 내려가다, 겨우 급하게 난간을 잡았다. 그때의 다급함은 하얀 니트 팔 부분에 남은 시커먼 빗물 자국이 증명하고 있다.
계단 난간을 잡은 후에도 심장은 너무 빨리 뛰었다. 더 미끄러졌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밑에 남은 계단들을 보니 더 소름 끼치고 아찔했다. 아마 계단의 단차나 폭이 일정하지 않은 데다 비로 인해 바닥이 미끄러워진 탓이었다. 놀란 마음을 겨우 쓸어내리며, '빗길 다닐 땐 더 조심하자'라는 생각과 함께 상황은 일단락된 듯했다.
그리고 다음날,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았다. 이게 얼마만의 상쾌한 저녁인지, 신나서 집에 가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어제 넘어진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계단이 바로 내 아래에 있는데, 마치 밟으면 푹 꺼질 것 같이 멀리 있게 느껴졌다. '한 발씩 차근차근 내려가다 보면 괜찮겠지...'라고 나를 다독이며 내려가려고 했지만, 무섭고 어지러워 그럴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실제로 꾹 참고 내려가다가 몇 번 계단을 잘못 헛디디거나 계단 한 두 개를 건너뛰고 내려가는 실수가 반복되었다. 처음엔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이게 말로만 듣던 트라우마인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한동안 그 계단으로 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트라우마 : 과거 경험했던 위기나 공포와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당시의 감정을 다시 느끼면서 심리적 불안을 겪는 증상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비 올 때 내려간 계단은 누구나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돌이켜 보니, 트라우마일지도 모르는 일들을 '유난/예민'이라는 이름 하에 그냥 넘겨졌던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어릴 때 굴을 잘못 먹어 여러 번 많이 토한 경험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 절대 토하지 않으려고 한 것. 거위 간을 먹고 속이 안 좋았던 경험 때문에 비슷하게 생긴 선지만 봐도 속이 울렁울렁 거리는 것. 트라우마의 크기는 천차만별이라, 작은 사건들 역시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젠 안다.
이제는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계단을 내려갈 수 있다. 내 발 밑에 계단이 있다는 걸 되뇌며 천천히 내려간다. 하지만 여전히 비가 오는 날이면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가 타고 가는 버릇이 생겼다. 트라우마임을 인지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육교 계단을 자연스럽게 내려갈 때에는 나의 트라우마도 조용히 잊힐 것이다. 모두의 트라우마, 안 좋은 기억들이 조용히, 자연스럽게 잊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