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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탈핵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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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창 Aug 31. 2023

당신은, 핵발전소를 유치하는 주민들을 이해할 수 있나요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는 사진작가, 장영식

교육철학을 공부한 장영식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짧은 교직 생활을 했지만, 1992년에 이를 그만두고 사진에 입문했다. 꽃, 정물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기록하다, 309일 동안 ‘85호 크레인’에서 농성을 벌였던 김진숙의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을 알게 되면서 그의 사진 세계 및 인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후 장영식은 전국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이해하고 고통받는 사람과 현장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에서 살아가고, 고통받으며 또 싸우는 다양한 사람들에 주목한다. 현장에서 자신이 파악한 문제의 본질을 사진과 글로 요약하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장영식의 포토에세이”에 2014년 이후로 약 10년째 전하고 있다.

2014년 밀양, 그곳에서 처음으로 장영식을 만났다. 내가 밀양을 방문했던 이유는 밀양주민의 송전탑 투쟁과 한 노인의 분신 때문이었다. 송전탑이 들어설 부지에 주민들은 농성장을 만들었고, 시민 연대자들과 카메라를 든 사진작가가 함께 있었다. 큰 키에 모자를 쓰고 별말 없이 무뚝뚝해 보였지만, 카메라를 손에 놓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현장과 사람들을 기록한 이가 장영식이었다. 현장을 목격하고, 사람을 기록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문제를 알리는 그를 약 10년 뒤 ‘탈핵 잇다’를 통해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 번째 인터뷰는 7월 22일, 두 번째 인터뷰는 8월 5일에 부산에서 진행했다.


현장을 찍는 사진작가가 된 이유

그가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사진작가가 된 이유는 ‘사진에 대한 이상한 애틋함’ 혹은 ‘미련’ 때문이었다. 장영식은 사진에 관심을 두고 본격적으로 입문하는 다른 작가들처럼 처음에는 정물이나 풍경을 찍다가 현장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장영식의 사진과 삶이 완전히 바뀐 것은 2011년, 85호 크레인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김진숙 지도위원, 출처: 장영식 페이스북


현장을 찍기 시작한 것은 2011년, 85호 크레인에서 시작해요. 제가 아들하고 우연히 수요미사를 갔는데, 저 높은 크레인에 사람이 있다는 거야. 처음 간 날이 진숙 씨 생일이었는지 학생들이 손자보를 만들고 생일 케이크를 전달하려고 정문까지 갔는데, 떡대 같은 용역 직원들이 그걸 막았어요. ‘제가 부산에 살면서도,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너무 관심이 없었다….’라는 반성과 성찰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이후 85호 크레인을 꾸준히 촬영했고, 내려올 때까지 했으니까. 저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의 매일 갔어요.


장영식은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오른 지 200일이 되어 가던 여름 이후, 약 100일이 넘도록 매일 현장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의 사진과 인생이 어떻게, 왜 바뀌게 된 걸까?


지금까지의 사진들은 그냥 유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진에 대한 철학이 바뀌었어요. 사진은 사회적 담론을 만들고, 사회적 약자를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죠. 진숙 씨의 투쟁을 기록하면서 앞으로 내가 무엇을 찍어야 할지, 어떤 현장을 기록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어요.


2013년 5월의 밀양

장영식의 사진과 인생에 영향을 준 것은 ‘85호 크레인’ 외에도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밀양’이다. 밀양송전탑 갈등은 대한민국 중앙집중형 에너지체제의 문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회갈등 중 하나이며, ‘전기는 할매의 눈물을 타고 흐른다’와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라는 상징적인 구호를 남기기도 하였다.

   

2012년부터 밀양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부산에서 단체로 밀양에 갈 기회가 생겨서 처음으로 가 봤죠. 밀양에 집중하게 된 건 2013년 5월부터였어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2013년 5월 22일에 제가 울산에서 온 연대자랑 새벽에 카톡을 주고받으면서 현장에 갔어요.

 

2013년 5월 22일 장영식이 농성장에 처음 갔을 때, 그곳을 지키던 주민이 그를 보고 가슴을 치면서 “아이고, 이제 우리 살았다, 우리 살았어”라고 말했는데, 장영식은 그 주민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그 역시, 아무런 힘도 없는 사진작가일 뿐인데, 왜 할매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지. 그러나 장영식은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왜 주민들이 사진작가의 방문에도 좋아했는지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광주를 겪고, 광주를 기억하는 5월에 산골짜기에서 할매들을 고립시킨다는 걸 솔직히 상상도 할 수 없었죠. 30도가 넘는 아주 뜨거운 날씨였는데, 할매 일고여덟 분이 물도 못 마시고, 소변도 못 보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경찰이랑 한전직원이 못 들어간다고 막더라고요. 기가 막히는 거죠. 그걸 뚫고 현장에 가보니, 한전직원은 할매들을 고립시키고, 경찰들은 그 광경을 보고도 그냥 점심이나 먹고 물 마시면서 그늘에서 쉬고 있지. 거기서 내가 너무 화가 나서 한전과 경찰에게 “너희들이 인간이냐”고 울부 짖었죠.     


한전과 경찰 20-30여 명은 밀양주민들을 고착시키기 시작했고, 할매들은 옷을 벗고 똥물을 던지며 저항하다 결국엔 끌려 나왔다. 장영식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2013년 5월의 밀양을 찍었고, 그 사진들을 부산일보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을 통해 알렸다. 그의 사진을 본 시민들은 밀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민주적인 모습에 사회적인 공분을 느꼈고, 보다 많은 사람이 밀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어 장영식은 <사람이 한울이다>라는 제목의 밀양 송전탑투쟁 사진전을 2013년 6월 27일부터 28일까지 국회에서 열었다.


농성장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것은 철저하게 거리를 둔 채 제 작업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뭔가 인간적으로 할매들과 친해지기까지는 오래 걸렸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경계가 풀리면서, 느슨해진 것도 있지만, 장점도 있더라고요. 지금도 교장 선생님 부부, 덕촌할머니, 동래할머니, 영원한 투사였던 한옥순 할매... 그분들의 목소리들이 지금까지도 쟁쟁하니까. 제가 허투루 살 수 없는 거죠. 아마 밀양은 많은 사람에게 굉장히, 울림이 있었던 것 같아요.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을 오랜 기간 기록하면서 장영식은 사회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무엇을 찍을지 고민했다. 이후 밀양을 만나면서, 장영식은 그동안 관심을 두지 못했던 ‘핵발전소’에 의존하는 우리의 삶과 전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희생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 장영식은 “밀양 때문에 우리가 탈핵을 좀 더 성찰하게 되었고, 근본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강조했다. 그래서일까. 국내외의 다양한 현장을 기록한 장영식이지만, 그는 밀양이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2014년 6월 11일 행정대집행 직전의 농성장, 출처: 장영식 페이스북


밀양을 통해 알게 된, 국가와 한전, 경찰이 지역의 촌로들을 대하는 가혹한 방식, 힘든 현장에서도 연대와 우애를 나누었던 사람들. 무엇보다 장영식은 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주민들의 직관과 통찰력에 많이 놀랐다. “제가 밀양 이후에 고리 핵발전소가 보이는 골매마을을 기록하기 시작했거든요. 핵발전소는 전혀 몰랐는데, 이 마을을 가게 된 건, 밀양 한옥순할매가 어느 날 저에게 던진 질문 때문이었어요.”     


하루는 할매가 “송전탑 뒤에 뭐가 있는지 아노?”라고 하셨어요. 그때만 해도 핵발전소 잘 몰랐거든요. 그냥 밀양이 아파서 이곳에 왔고 최선을 다해 기록했는데. 좀 충격을 받았어요. 음, 뭐가 있지? 할매가 하는 말이 ‘이 송전탑 너머에 핵발전소가 있다’는 거야. 그리고 ‘765kV 송전탑은 핵발전소의 자식’이라는 거예요. 나는 그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어떻게 할매가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송전탑이 핵발전의 자식’이라는 말을. 그래서 내가 약속을 했어요. 밀양싸움이 끝나면, 핵발전소를 꼭 가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2014년 6월 행정대집행이 끝나고, 가을인가 겨울에 처음 갔는데, 가다 보니 조그마한 마을이었는데, 거기선 고리핵발전소 돔이 너무 잘 보이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거기에 간 게 아니고, 우연히 도착한 곳이 알고 보니 골매마을이었어요. 이 마을에 처음 들어갈 때의 음산했던 기억은 꼭 영광핵발전소를 처음 갔을 때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골매마을을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한옥순 할매의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밀양송전탑에서, 고리 핵발전소로 저의 관점도 이렇게 이어지고 확대가 된 셈이죠.


골매마을핵발전소로 두 번이나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1969년 대한민국 최초의 핵발전소 건설을 위한 전국 10개 후보지 중 고리가 최종 결정되었을 때만 해도 주민들은 전기공장 하나가 마을에 들어와 개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핵발전소는 그들 삶의 터전을 빼앗았고, 결국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1969년 고리핵발전소 건설로 고리마을에서 살던 162가구 중 대부분은 온정마을과 골매마을로 집단이주하였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1969년 11월 늦가을에 골매마을로 떠밀려 온 사람들에게 정부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고 논과 밭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상 이는 강제이주나 다름없었다. 집도 없이 군용천막에서 살게 된 그들은 먹고살 것이 없으니, 바다로 뛰어 들어가 먹고 팔 것들을 채취해야 했다. 잠수복이 있는 것도 아니라 입던 것 그대로 바다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렇게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겨울을 보내고 나서야, 뒤늦게 받은 보상금으로 집을 하나둘 짓기 시작하였다. 자기 삶의 터전과 고향마저 잃은 사람들, 그들의 곤궁과 힘듦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다를 생계로 삼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업권입니다. 애초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집단이주한 골매마을 사람들의 어업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분쟁 끝에 최소한의 어업권을 가지게 된 골매마을 주민들은, 바다와 약간의 땅을 경작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유지하며 살기 시작했는데, 신고리 핵발전소를 짓는다고 해서 이들은 다시 쫓겨나게 됩니다. 골매마을로 이주한 할머니는 매일 고리를 바라보면서, “고리에 가고 싶다, 고리에 가고 싶다”라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말씀도 “고리에 가고 싶다”였다고 합니다. 핵발전소 때문에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한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7월 22일 방문했던 골매마을은 고리 핵발전소에서 너무 가까웠다. 논, 밭, 바다, 집, 골목 등 마을 어디에서도 핵발전소 돔이 보일 정도였다. 이곳에서의 삶의 무게와 애환을 다 이해하고 상상할 순 없겠지만, 주민들은 핵발전소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두 번이나 쫓겨난 것이다. 고리 핵발전소에 이어 신고리 1·2·3·4호기 핵발전소까지 확대되어 새롭게 지정된 부지에 골매마을이 다시 포함되었다. 골매마을 주민들은 집단이주 후에도 신고리핵발전소 1·2호기와 3·4호기 공사를 지켜보았는데, 숱한 발파작업으로 인한 소음과 분진에 시달렸다. 한수원은 더욱이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신고리핵발전소 5·6호기 건설 공사를 승인받기 전인 2015년부터 주민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수중 취배수구조물 축조공사를 불법적으로 강행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경작 중인 작물을 수확하라며, 결국 이주를 촉구하기까지 했다. 장영식은 두 번이나 잔인하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그들을 ‘슬픈 유민(流民)’이라 불렀다.


어느 순간 우리는 ‘고향’이라는 개념, 감각이 거의 없잖아요. 한 70대 이상 넘어가야, 고향이나 마을에 대한 감각이 있을 텐데. 저도 60대지만, 사실 고향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어요. 고령의 주민들은 고향을 떠난다는 것에 대한 상처가 굉장히 큰 거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핵발전소로 인해 뿌리 뽑힌 거니까. 그만큼 1세대들에게 고향의 의미는 남다른 거죠. 아주 오랫동안 노력해서 겨우 정착한 마을에서 살 만하니까 또 쫓겨난 말도 안 되는 폭력의 역사를 겪어오신 거죠.     


‘공공성’과 ‘개발’의 이름으로 전력을 생산하는 핵발전소를 짓기 위해 누군가의 삶과 평생의 터전이 사라진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러한 국가폭력은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에 만들어진 ‘전원개발촉진법’에 의해 쉽게 정당화되곤 했다. ‘전력생산과 공급’의 중요성을 내세워 송전탑과 핵발전소를 세웠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삶과 권리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그저 개개인에게 전가되었다. 뒤늦게 발전소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지만, 갈등이나 문제의 핵심을 해결하기보다는 ‘보상’과 ‘지원금’으로 갈등을 무마하거나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 등으로 갈등은 불행히도 주민들 사이로 다시 옮아가기 일쑤였다.

이처럼, 전기의 공공성을 강조하며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사람이 살던 곳에 핵발전소가 세워지고 가동되는 동안, 최인접마을에서 살던 주민들은 피해와 영향에 스스로 대응하거나 적응하며 살아야 했다. 집단이주를 간 곳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아 입던 옷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거나 힘들게 거친 논과 밭을 새롭게 경작해야 했고,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로부터 어업권은커녕 마을 구성원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던 삶처럼 말이다. 즉, 핵발전소와 함께 30-40년을 살아간 주민들이 체득하고 경험했던 것은 그 누구도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그들은 피해와 영향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개인화 혹은 사사화’에 적응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설적이고도 무책임한 역사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주민들의 선택 하나가 있었다. “핵발전소를 반대하기 때문에 유치한 사람들”, 장영식은 이를 ‘슬픈 역설’이라고 말했다.


골매마을 골목에서 본 고리핵발전소 돔, 글쓴이 찍음

핵발전소를 반대하기 때문에 유치 신청했던 사람들

신고리핵발전소 5·6호기 공론화 과정에서 나 역시 한 주민들이 내건 요구에 어안이 벙벙했었다. 한수원 노동조합만큼이나 더 강렬하게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을 반대했던 사람들. 그들은 누구이며, 왜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지지했던 것일까? 2017년 당시 장영식의 시선도 그들에게 오랫동안 머물렀고, 그는 2017년 10월 12일 “왜 우리가 핵발전소를 찬성해야만 했을까요?”라는 제목의 포토에세이를 작성했다. 장영식은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주민 중 일부는 신고리 핵발전소 5,6호기 건설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습니다. 신고리 핵발전소 건설이 고시될 때부터 가장 강렬하게 반대했던 주민들이 왜 찬성하고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그토록 반대했던 신고리 핵발전소 3, 4호기가 이 지역 어디에서도 훤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집 마당에서도 동네 골목길에서도 바다 위 삶의 현장 어디에서도 핵발전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핵발전소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핵발전소가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년 전,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두려웠던 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고리 핵발전소 3호기 건설 때, 온갖 소음과 폭발음 등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에서 온갖 짝퉁 부품을 보도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민들 간에는 신고리 핵발전소 3호기의 문제점과 그 위험성에 대해 귓속말로 주고받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장영식의 기사 “왜 우리가 핵발전소를 찬성해야만 했을까요?” 중 일부)
마을에서 보이는 핵발전소, 출처: 장영식 페이스북

장영식은 “그들은 누구보다 핵발전소를 반대했고 오랜 기간 싸웠으나, 결국 국가가 밀어붙이는 핵발전소를 막아내지 못했다. 때로는 함께 싸웠던 활동가들에게 상처를 받았고, 이웃 주민들에겐 날이 선 말들을 해야 했다”라고 말하며, “신고리 핵발전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새 핵발전소를 자신들의 마을에 유치해야 이곳을 떠날 수 있는 주민들”의 모순된 삶의 모습을, 참담한 현실을 기록했고 이해하고자 했다. 핵발전소가 싫어서 핵발전소를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누가, ‘찬핵론자’, ‘핵마피아’라고 돌을 던지며, ‘돈 때문에 핵발전소를 유치’한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     


꼭 돈 때문이 아니에요. 근데, 그걸 현장에도 와보지 않은 전문가들은 핵발전소를 찬성하는 그들을 ‘돈에 환장한 사람들’로 분석하더라고요. 활동가들조차도 그렇고요. 근데 저는 오히려 되묻고 싶어요. 그 사람들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할 때, “우리가 편하게 쓰는 전기 때문에 희생당한 지역과 고통받아 온 사람들에게, 우리는 얼마만큼 성찰했고 고백했는가.”를. 우리는 우리의 안락한 삶과 그들의 희생과 피해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에서 새로운 탈핵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논리와 지식만 가득한 글과 말이 아니라, 주민들의 삶과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장영식이 ‘슬픈 역설’이라 부르던, 한편으론 잘 이해되지 않는 주민들의 선택을 나 역시 ‘찬성’과 ‘반대’라는 이분법적인 구도 안에서만 생각하고 바라보았으며 그들을 비판하고 나무랐었다. 현장에 와 본 적이 없으니, 핵발전소를 유치하는 주민들은 ‘그저 돈만 밝히는 사람들’이었고, ‘핵발전소라는 위험과 편익을 기꺼이 교환’하려는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와 같은 누군가에게 ‘현장’인 그곳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떻게든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억척같이 살아내야 하는 일상과 삶의 공간이었던 것을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좋고 나쁨, 찬핵과 탈핵의 윤리와 도덕적 잣대로는 설명할 수도 경계지을 수도 없는 ‘현장’ 너머의 삶의 복잡함이, 그들 빼앗긴 삶과 역사에 알알이 박혀 있었다. 장영식의 질문은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돈다. 우리는 얼마나 반성하고 그들 유민의 역사를 이해하려 했는가? 구조를 바꿀 수 없는 이들이 한정된 자원 안에서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타협해야만 했던 순간들을 우리는 아무런 이해 없이 너무 쉽게 단정하고, 분석했던 것은 아닐까?


현장을 버리면, 현장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그 운동이 제대로 알려질 수 없어요. 사실 부산도 마찬가지거든요. 무슨 탈핵집회를 해도 정작 마을에 사는 주민이 이제는 안 온단 말이에요.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사람들을 설득하고 함께 해야 했는데,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요. 마을주민들은 “함께 싸우던 활동가들이 현장을 떠날 때, 그들에게 굉장히 상처를 받았다고 해요. 같이 싸웠는데, 갑자기 활동가들이 떠나니까.” 주민들은 그걸 겪으면서 이젠 활동가들을 외부 사람 취급하는 거죠. 못 믿겠다는 거고. 그러면서 그들도 싸움이 아니라 최대한 ‘유용성’을 얻어낸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거죠. 싸우기도 해봤고, 반핵도 외쳐봤지만, 함께 싸웠던 활동가들은 떠나고, 자기들만 남은 상황에서. 주민들에겐 삶과 운동이 분리가 되는 게 아니잖아요. 활동가들이나 연구자들은 잠깐 와서 목소리 외치고 주먹 몇몇 하늘로 뻗다가 집에 가면 그만이지만. 여기에 사는 주민들은 그게 아니니까. 내가 가도 주민들은 인상을 팍 써요. 계속해서 노력하고 찍은 사진을 드리기도 해요. 근데, 커피 한 잔 하면서 얘기 좀 하자고 하면, 안 하지. 주민들은 우리를 못 믿게 된 거죠. 참 안타깝고 미안하죠.     


현재의 시선으로만 주민들을 평가하면 핵발전소를 지지하고 찬성하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30~40년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주민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우고 반대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다 함께 싸우던 활동가들에게 상처도 받고, 정부와 한수원에 대항해 싸우다 지치기도 하며, 결국엔 모든 걸 다 빨아들이는 거대한 힘에 싸울 기력도 의지도 빼앗겨 원전지원금을 바라거나 핵발전소를 추가 유치해서 도망을 택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알지 못한 그들의 역사인 것이다. 장영식은 한 걸음 나아가, 핵발전소로부터 혜택을 받는 지역주민은 소수로, 지역의 토호 세력이나 건설업자이고 대부분 주민은 아무런 혜택이나 이익도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고리갔을 때 커피를 마셨는데, 해녀회관을 수리해서 마을카페로 만들었어요. 근데 그것도 그 지역의 토호세력이나 건설업자들이 사업을 따내서 돈을 버는 거죠. 발전소에서 지원금이 나와도 이들 소수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기자회견이든, 뭐든 현장에서 해야 한다고 계속 말하죠. 왜 누구도 듣지도 않는 시청 앞에서 하냐는 거지. 맨날 똑같은 기자회견, 아무런 변화 없는 기자회견, 기자 몇 명 오지도 않고, 보도도 안 되는 기자회견을 왜 현장이 아닌 시청에서 하냐는 거지. 현장에서 기자회견 하면 싸움이 나겠지. 그걸 이해하는 것에서 진짜 운동과 활동이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왜 저 주민들이 그렇게 반대하고 탈핵을 외치는 우리를 싫어하나, 그것도 들어보고. 우리가 이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이해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보고. 서울에서 오는 활동가들도 부산 중심지에서만 집회하거든요, 그럼 현장을 몰라. 핵발전소가 있는 마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왜 지역주민들은 우리를 싫어하고 반대할까를 힘들더라도 겪어봐야하는데, 그걸 안하니까 활동가들의 활동조차 현장과 괴리가 생기는거지. 그런 거에 대한 나의 분노와 안타까움이 있는 거예요.


새로운 탈핵운동

장영식은 새로운 탈핵운동이란 참회와 고백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것은 현장, 누군가가 살아가는 삶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존중과도 연결된다.     


사실, 문재인 정권에서 탈원전정책을 실행한 것이 대단하기도 했지만. 그 방식을 생각하면, 너무 거칠고 단순하게 가지 않았나 생각해요. 핵발전소를 지지하고 찬성하는 집단을 하나같이 ‘핵마피아’로 낙인찍고, 모두 없애 버려야 하는 집단으로만 접근하니, 우리 스스로도 왜 탈핵을 하는지 우리의 삶과 핵발전소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과정에서 누가 어떤 피해를 받아왔는지를 고민할 시간이나 여유도 없었죠. 그저 낙인찍고, 피아를 구분해서 핵발전소를 없애자고 말하는 방식이, 한편으론 통쾌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사실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잖아요.     


장영식은 당시 고리핵발전소를 건설했던 1세대 전문가들을 만나 분노로만 접근한 채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과 연민의 부족을 안타까워했다.


그분들은 “진짜 애국심”으로 지었다고 하세요. 모든 부품이 외국에서 들어와야 하니까 나사 하나하나를 아끼면서 발전소를 지었을 때 얼마나 보람을 느꼈겠어요. 전기 때문에 산업화를 이루었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 ‘나쁜 놈들’이라고 하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 “여러분들의 헌신과 수고 때문에 지금의 한국이 있을 수 있었다. 고맙다. 지역사회의 주민들이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충분히 그들의 노고와 희생을 인정하되,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고, 전환을 요구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 전환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 탈원전을 접근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분들의 자존심은 살려주면서 전환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존중과 연민, 이해와 사랑은 없고 분노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장영식은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앞으로의 탈핵운동은 “찬핵 아니면 반핵의 구도로 서로를 비판하고, 반대하며 싸우는 모습만이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핵발전소가 아닌 대안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등 과거와는 싸우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는 탈핵 활동가들은 정말 부산에서 강원도까지 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 나름으로 기록도 하고, 고민도 하고 정말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송전탑-핵발전소-화력발전소가 7번 국도를 따라 이어져 있고, 우리나라 중앙집중형 에너지시스템의 모순이 고스란히 있거든요. 무엇보다 현장을 직접 가봐야 문제를, 그 속의 구체적인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거죠. 그래서 모든 게 연결되어있다는 걸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머리로만 그걸 떠올리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그릴 수 있어야 진정한 이해와 공감이 생기고, 문제에 다가가는 새로운 능력이 생긴다고 봐요. 이거 아니면 저거, 설득의 과정 없이, 주입만 하는 것은 한계가 있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득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겐 이것이 더 필요한 거죠.


현장의 고통을 목격하고기록하는 이가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

장영식은 밀양을 기록한 뒤 <밀양아리랑>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는 “차마 눈으로 볼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나는 사진가로서의 냉정한 이성을 잃고, 울면서 항의하고 항의하면서 셔터를 끊었다. 나로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참혹한 현장이었다.”라며 사진작가로서 현장과의 거리감을 두는 것에 실패하고 분노했던 하루를 이렇게 기록했다.

현장에서 누군가의 고통을 기록하고 목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70대 노인들이 경찰과 한전 직원들에게 고착 당하는 모습에 장영식은 분노했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대신 할매들과 함께 싸웠다. 또한, 2012년 1월 보라마을 주민 이치우 씨가 자신의 논에 용역들이 장비를 들여놓고 공사를 시작하려 하자,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이곳을 2012년 8월에 방문했던 장영식은 길에 있던 ‘이상한 자국’을 오랫동안 응시했고, 그 자국들을 쓰다듬었다. 그는 “이 비극적인 슬픈 자국을 촬영하여 기록으로 남겨두었다”라고 말했다.


     

보라마을 고 이치우님의 분신 자국, 출처: 장영식 페이스북
어떻게 보면, 부정의한 현장을 가장 먼저 목격하는 증언자인 거잖아요, 저는. 그렇다 보니 그분들이 절규하고 고통받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기록하는 거죠 저의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절망과 분노를 네모 프레임에 담을 때도 힘들지만, 찍은 사진을 제 작업실에서 현상해서 볼 때 그 순간이 참 두려울 때가 있어요. 타인의 고통을 나는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어떤 순간을 찍을 것인가, 내가 찍은 이 고통스런 사진을 세상에 내놓을 것인가. 이런 고민이 저에게 주어지는 거죠, 너무나 고통스러운 순간들이죠.


누군가의 고통을 목격하고 기록하는 일, 기록한 사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세상에 공개하는 과정에서 장영식은 때로는 트라우마를 겪기도 했다. 그에게 더욱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사진을 요구할 때, 장영식은 또 다른 차원의 어려움을 느꼈다.     


현장의 어떤 사람들은 사진작가인 나에게 ‘선정적인 사진’을 요구했어요. 나는 그런 사진을 찍는 것을 안 좋아했는데, 제가 찍은 사진을 보내주면, “선생님, 이런 작품 사진 말고요.”라면서 더 주민들의 고통과 절규가 직접적으로 담긴 사진을 요구했다. 그러면 나는 “어...어...” 이러면서 밤새 당혹스러운 거죠.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굉장히 당황, 당혹스러웠어요. 만약 누군가가 분신을 했다. 나는 그럼 그 사진을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겠죠. 그리고 설사 찍었다 하더라고, 어느 시점에 공개할지 모르겠지만, 바로 다음 날 공개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근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바로 달라고 하니까, 나에게는 그게 너무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거지요. 할매들이, 주민들이 고통받는 사진들을 달라고 하니까, 그래서 때로는 저분들이 ‘상처를 상처로 갚으려고 하는구나’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물론 그분들은 정말 절박하니까 자극적인 사진을 저에게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런 사진들은 사실 휴대폰으로 얼마든지 찍을 수 있을텐데. 그런 트라우마들이 많죠.


카메라가 무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영식은 2014년 이후 약 10년 동안 전국의 현장을 방문하여 고통과 아픔을 목격하고 기록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포토에세이>는 장영식이 새롭게 시도한 글쓰기 방식으로, 사진과 글로 현장의 문제를 날카롭게 정리하였다. 밀양송전탑에서 고리핵발전소에 의해 사라진 골매마을로 확대된 관심과 발걸음이, 포토에세이를 통하여 7번 국도로 이어졌다.     


7번 국도는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핵발전소랑 송전탑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원도 삼척에는 또 어마어마하게 화력발전소가 있는 거죠. 우리는 강원도 생각하면 청정한 지역으로만 생각하잖아요. 근데 거기에 화력발전소가 집중되어있는 거예요. 아름다운 맹방해변이 파헤쳐지고 그 위에 석탄을 운반하기 위한 선착장이 건설되는데. 탈핵과 탈석탄을 선언한 정부에서 이런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죠. 7번 국도는 아름다운 해변으로만 알려졌지만, 우리나라의 폭력적인 에너지 체제를 보여주고 있죠. 송전탑, 핵발전소 그리고 화력발전소까지.


해변에 건설되는 석탄을 운반하기 위한 선착장, 출처: 장영식 페이스북


불과 2-3년 전만 해도 전국을 다 다니며 현장을 기록했던 장영식은, 최근에는 카메라가 좀 무겁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탈진되어서, 텅 빈 정신이 오는 거예요, 갑자기. 모든 것이 텅 빈 상태가 오는 거예요. 이 상태를 어떻게 내가, 극복할 것인지 고민 중이에요. 사실 카메라의 절대적인 무게는 그대로지만, 왜인지 모르겠지만 좀 무겁게 느껴지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이제는 전국을 가진 못할 것 같고 대신 내가 가고 싶은 곳만 가겠다, 그렇게 준비를 하는 거죠. 빨리 핵발전과 생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진작가가 나오면 좋겠는데. 한국사회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는 대부분 노동문제에만 집중하니까,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핵발전이나 환경, 생태 문제에도 관심을 두는 작가가 나타나야 하는데 좀 아쉬운 거죠. 사실 거기에 대한 중압감이 좀 많아요. 여전히 친한 활동가들은 저를 감사하게도 “자기들의 든든한 지원자”라고 부르지만, 모르겠어요. 가끔, 제가 중압감도 느끼고, 이제는 좀 무겁다..라는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 들어요.     


매달 두 편 이상의 포토에세이를 쓰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여 그들을 이해하고 기록한다는 것은 에너지와 함께 현장에 대한 이해 및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영식은 “어느 순간엔 제가 절필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스스로 현장에 대해 이해나 공부가 충분히 되지 않은 채 글을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좀 챙피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주기적으로 글만 쓰는 게 아니라 글과 사진을 같이 한다는 것이 너무 빨리 오는 거죠. 예전보다 그 속도가 빠르게 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거기서 오는 트라우마도 있었고. 밤에 혼자서 작업을 하다,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도 있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장영식이 세상을 기록하는 법

사진을 모르는 나는 장영식에게 아주 기본적인 것을 물어보았다. 현장에서 그는 과연 몇백, 몇천 장의 사진을 찍을까? 그렇게 찍은 수많은 사진 중 어떤 사진을 무슨 기준으로 고를까? 나의 질문에, 카메라가 무겁다고 말하던 장영식에 목소리에 다시 힘이 느껴졌다.     


저는 현장에서 후회 없이 셔터를 누르라고 말해요, 아끼지 말고 가져간 메모리 카드를 가득 담을 수 있을 만큼 찍으라고 말하죠. “자기가 가져간 메모리는 다 써라. 치열하게 고민해서 찍고, 와서 고민해서 고르고.” 물론 저는 125기가를 가져가지만, 그걸 다 찍는 건 굉장히 힘들거든요. 그냥, 최선을 다해서 찍어보는 거죠. 근데 어떤 사람은, ‘오늘 나는 찍을 게 없더라’고 말하면서 10장 정도만 찍었대요, 물론 그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게 잘 이해는 안 되죠. 저는 현장에 가면 처음에는 전체적인 배경도 보고, 들어갔다가, 더 깊이 들어가고.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고, 그런 거리(감)가 필요해요. 그러다 집중할 때는 뭐 정신없지. 사진을 찍는데, 어떤 곳에서는 정말 정신없는 곳이 있어요. 완전히 클라이맥스처럼. 그 어떤 것도 양보할 수 없는. 그때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찍거든, 완전히 몰입한 거지. 깊이 들어가거든. 일단 들어가서 찍는 거지, 그럴 때가 있어요. 경찰이 막든, 누가 막든 전 들어가죠. 근데 전 연사로 안 찍고, 단사로 찍으니까. 어떤 사람은 연사로 찍는데, 저는 그걸 이해 못 하지.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장을 어떻게 찍고 남길 것이냐도, 그걸 연사로 찍냐, 한 컷 한 컷 단사로 찍느냐도 굉장히 중요한 고민거리죠 저에게는.


장영식은 항상 현장 가기 전날 사진기를 꼼꼼히 점검한다. 배터리와 메모리카드를 점검하고, 멀리 가는 날엔 a/s 센터에 가서 사진기랑 렌즈까지 한 번 더 확인하고 현장에 간다. 그런 그에게 사진기는 무엇을 의미할까?     

저는 사진기를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나의 벗으로 생각하죠. 운명적인 만남으로 보기 때문에, 그 벗에게 내가 소홀할 수 없는 거죠. 내가 찍고 싶은 순간을 사진으로 담아주는 게 얼마나 고마워. 내 마음과 내 관점과 교감하는 그대로 사진에 드러날 경우엔 정말 고맙죠. 그래서 어떨 때는 사진기를 보고 “고맙다, 수고했다”. 그러거든요. 이게 나한테는 단순한 기계나 도구가 아닌 거죠. 이런 마음이나 교감 없이는 결과물이 안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소통하는 거죠. 또 내가 미리 계획하고, ‘오늘 이런 사진을 찍겠다’라고 계획하고 가면, 그런 사진이 안 나와요. 오늘은 무엇을 찍어야겠다가 아니라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라는 생각만 가지고 가죠.     


그렇다면, 장영식은 단순한 도구나 기계가 아닌 ‘벗’인 카메라가 찍은 수많은 사진 중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할까? 혹은 무엇은, 왜 선택되지 않을까?     


그냥, 교감이죠. 특별히 어떤 게 좋다기보다는 무언가, 내가 찍었을 때의 느낌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충족해주면 그게 바로 좋은 사진이고. 그게 아니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 거죠. 근데, 그래도 세 번은 봐요. 감정이 안 오면, 그냥 이건 좋은 사진일 뿐이지, 느낌이 있는 사진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죠.


현장을 기록하는 또 다른 이유부르심에 대한 응답

마지막으로, 현장을 방문하여 기록하는 것이 그의 종교와 관련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그런 것도 많죠. 자꾸 이끌림이 있는 거죠.”라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아담, 너 어디에 있느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들리는 ‘부르심’에 이끌려 현장으로 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갔을 때 70~80% 갈 때마다 어떤 일들이 발생했어요. 슬픈 이야기지만. 그런 일이 많았어요.     

부르심에 대한 응답. 사진기를 들고 현장을 방문하여 누군가의 삶과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그에게 또 다른 방식의 소통과 이해였다. “사진기를 들고 산길을 걷고, 골목길을 걷는 것이 그냥 걷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도 하나의 소통이거든요, 자연과 세상과 인간을 더 이해하기 위해 현장을 찾는 것 같아요. 근데 네모 프레임만 보고 가면, 정작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안 보이잖아요. 마을의 역사를 느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네모 프레임만 쫓는 거죠.”     


사진의 70%는 발이 찍는다고 생각해요. 현장에 가면 조그마한 골목길을 걷고, 공기를 느끼고, 바람의 소중함을 느끼죠, 그리고 항상 질문하죠. “너 어디에 있느냐”. 하느님이 아담에게 이런 질문을 했는데. 그래서 항상 고민하죠. 난 어디에 있지, 난 무엇을 기록해야 할지에 대해. 그래서 나의 사진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해요. 인위적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잘 안 되고, 내 마음이 이끌리고 갔을 때, 내가 작업했던 내용은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하죠. 그 부르심과 응답의 관계를 잘 생각해봐야죠.     


장영식의 사진과 글, 인터뷰를 통해 나의 안락한 삶을 위해 핵발전소, 송전탑, 화력발전소 등에 고통받아야 했던 수많은 ‘유민’들을 떠올렸고, 그들의 굴곡진 그러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이해하려 했다. 더 많은 영식이 현장과 사람들을 기록하고 현상 너머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때 비로소 장영식은 무거웠던 짐들을 내려놓고,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가 아끼는 벗과 함께 현장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사진작가 장영식, 출처: 장영식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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