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자필멸(生者必滅), 살아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어떤 예외도 없다. 인간의 숙명이다. 모두에게 정해진 미래이다.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이 평화롭기를, 의미 있게 삶이 마무리되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구나 평생을 걸쳐 찾아 헤매는 화두이다. 그러나 인생은 의미보다 욕망의 힘이 세기에 쉽사리 길을 잃곤 한다.
그리스·로마의 스토아학파는 일상에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네 가지 미덕을 실천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유다이모니아 즉, 최선의 인생이라 믿었다. 그럼에도 삶의 의미를 지키려고 도모하는 일이 오히려 존재를 망가뜨리는 기막힌 순간들로 왜곡되는 일들은 다반사이다. 잘살다 떠나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이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인간에게 있어서 궁극에 의도했던 죽음이 아니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택은 살아 있는 동안 정성을 다하는 것뿐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 숙명
여러 나라 존엄사 인정 추세
연명의료 중단, 담론 만들어야
환자 선택에 사회적 공감 필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했던 유다이모니아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로서도 모든 고통을 존중하며 환자 앞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나 생명의 임계점에서 의학적 치료가 무의미함을 이야기해주는 것은 매번 고통스럽다.
우리에겐 설 명절 기간인 11일, 드리스 판 아흐트 네덜란드 전 총리가 66년을 함께한 부인과 동반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사진). 판 아흐트 부부 모두 매우 아팠으며 서로가 없이는 떠날 수 없었다는 외신의 보도가 전해진다. 애절하다.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는 합법이다. 환자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치료의 가망이 없고 오랫동안 죽음에 대한 소망을 밝히는 등의 6가지 조건 아래에서 안락사는 허용된다. 2022년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를 택한 사람은 8720명으로 전해졌다. 적지 않은 죽음의 선택이다.
우리는 뿌리 깊은 유교문화권에서 인명은 재천이라 믿어왔기에 삶과 죽음에 대한 개인의 선택은 오로지 신의 영역이라 믿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존엄사’ 혹은 ‘안락사’라 에둘러 호칭하는 ‘의료 조력 사망’이라는 용어에 왠지 거부감을 느낀다. 존엄사는 의학적 치료를 다하였음에도 회복 불가능한 사망 임박 단계에 이르렀을 때,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질병에 의한 자연적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최소한의 품위와 존엄성을 유지하며 맞는 죽음을 의미한다. 생명 연장에 필요한 연명 치료는 회생 가능성 없는 임종 과정 환자에게 행해지는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체외생명유지술(ECLS), 수혈, 혈압상승제 투여 등의 시술을 의미한다.
안락사나 존엄사는 법적·윤리적·종교적·의학적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연관돼 있어 오랫동안 인류의 논쟁 대상이었다. 많은 나라에서 ‘적극적 안락사’는 여전히 허용되지 않는다. ‘적극적 안락사’를 법제화한 나라는 2002년 안락사를 최초로 합법화한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뉴질랜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캐나다 등이다. 미국의 경우 11개 주가 존엄사를 법제화했으며 여러 나라에서 존엄사를 인정하는 추세이다.
우리도 2009년 대법원이 ‘무의미한 연명 치료 장치 제거’를 인정한 판결 이후 2016년 2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단계에 있는 환자의 연명 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임종을 앞둔 환자는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수 있다. 또 19세 이상 성인은 연명 의료에 관한 자기 의사를 사전 연명 의료의향서 또는 연명 의료계획서로 남겨놓을 수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10월까지 사전 연명 의료의향서 참여자 수가 200만 명을 넘어섰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온전한 이성의 자신을 상실하기 전에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 개인, 그 선택에 대한 이해와 존중, 비록 소수 의견일지라도 존중하는 사회. 아마 의료 조력 사망의 진정한 가치는 죽음이라는 결과가 아닌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상황일 것이다. 각자가 겪는 고통의 무게는 존중돼야 한다. ‘있는 힘껏 사는 것’과 ‘최선을 다해 죽는 것’ 사이의 위계는 없기에 말이다. 질병 치료의 희망을 절연하고 강제된 죽음을 존중하자는 것이 아니다. 연명 의료의 순간에 중단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하나뿐인 목숨을 어떻게든 부지하는 것이 절대가치인 한국 사회에서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건 여전히 부도덕하고 논의조차 금기시된 일이다. 그러함에도 삶의 지혜는, 누구에게나 정해진 끝이 있다는 것의 자각이다. 사회학자 정희진의 말처럼 “삶이란 죽은 자의 망막에 맺힌 나의 시간”이다. 참을 수 없는 질병의 통증 앞에서 최선을 다한 치료가 더는 무의미하다면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환자의 선택에 대해 이제 우리 사회도 폭넓은 사회적 공감이 필요하다. 그 선택을 고통 속에 간절하게 원하는 환자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합당하다면 말이다. 가족의 동의가 있다면 말이다.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