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계절을 찾아서

by 허훈

“아빠, 뭐 좋아하세요?”

결혼한 딸아이의 단순한 물음 앞에, 내 머리는 순간 하얗게 비워졌다. 주말 외식을 정하자는 유쾌한 대화 속에서, 아내가 먹고 싶다는 ‘곱창’을 뒤로하고 ‘아빠가 좋아하는 것’을 묻는 딸에게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내가 뭘 좋아하지?


딸아이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가수는? 아내가 생일날 가장 받고 싶어 했던 선물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 아내가 편안해하는 옷차림. 수십 년간 나는 가족의 취향을 외우고, 예측하고, 실현하는 데 몰두하며 살았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의 선호는 기억 저편, 아니, 아예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가만히 되짚어보니, 쇼핑을 다닐 때도 ‘아, 저 옷 정말 멋지다. 꼭 입어보고 싶다’라는 말조차 해본 기억이 없다. 그저 아내가 권해 주거나, 사다 주면 입고, 입다 보니 정이 들어 애착을 가졌을 뿐이다.

순간, 벼락처럼 섬뜩한 깨달음이 내 안을 관통했다. 내 삶 속에 ‘나’는 과연 존재하는가? 마치 영화의 배경처럼, 가족이라는 주연들의 무대 뒤에서 소품처럼, 혹은 그림자처럼 살아온 것은 아닌가. 수십 년의 세월을, 나 자신을 빼놓고 흘려보낸 것은 아닌가.

가슴 한구석에서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가장으로서 가족의 행복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는 거대한 짐. 그 의무감에 짓눌려 살아왔기에, 지치고 힘들 때도 꾹 참고 웃어야 했다. 언젠가는 이 지친 마음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늘 내면을 맴돌았다. 나는 나를 들어내지 않는 것이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의무감의 굴레 속에서 나 홀로 시들어가는 모습은, 결코 가족에게도 행복한 향기를 풍길 수 없다는 것을.

내가 행복해야 한다.

내가 기뻐서 내뿜는 행복의 향기가 주변으로 자연스레 번져나가야, 비로소 가족도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억지로 만들어낸 행복이 아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행복 에너지'임을 깨달았다.

딸아이의 질문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원초적인 외침이었다. 이제, 육십 중반이 되도록 방치했던 ‘나의 계절’을 찾기로 했다. 더 이상 가족을 위한 도구가 아닌, ‘나’로 살아가기로 했다.

가장 먼저, 나 자신을 챙기고, 사랑하는 습관을 들이기로 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스타일을 입고 싶은지, 어떤 음식을 먹고 싶은지,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챙겨주기로 했다. 매일 아침 거울 속의 낯선 나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그 따뜻한 눈빛으로 가족과 세상을 바라보기로 했다.


비로소 ‘내 삶의 주연은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슴 중심에 주고 조금씩 이제야 실천해 가고 있다.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이 지극히 당연한 명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내 삶의 빛깔을 덧입힐 용기를 얻었다. 다음 주말 외식 때, 딸아이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할 나 자신을 기대하며, 나는 내 안의 ‘나’에게 조용히 속삭여 본다.

"그래, 이제 너의 계절을 살아도 괜찮아. 네가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하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