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4일 오후 2:36
올해 여름은 수박을 먹지 못했다. 이 사실이, 자꾸만 올해 여름은 수박'도' 먹지 못했다고 느껴진다.
수박은 달고 맛있다. 게다가 수분 보충에 좋고, 비교적 살찔 걱정도 없다. 이런 기특한 과일을 내가 마다할 리 없다. 아직은 익지 않았다고 지나치는 엄마의 카트에 기어코 수박을 실어버리는 모습은 나의 여름에 빠지지 않는 풍경이다. 그 후엔 집에 돌아와 수박 끈도 풀지 않은 채로 냉장고에 넣어둔다. 살얼음이 끼기 직전의 빨간 수박을 한 입 베어물면 한여름의 눅눅함마저 미화된다.
하지만 올해 여름은 이토록 좋아하는 수박을 한 번도 맛보지 못했다. 계절 과일을 놓쳤다는 단순한 사실이 이런 사소한 즐거움조차 놓쳤다는 자괴로 번진다. 이번 여름, 나는 어쩌다 수박을 먹지 못했는가?
우리 집안의 가장 큰 소식은 조카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온 식구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왕자님을 돌봐주느라 엄마는 매일같이 언니네에 있다. 식탁을 책임지는 엄마의 체력이 바닥나 장을 볼 시간이 부족해 수박을 먹지 못한 것일까?
아니다. 물론 내가 사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올여름 많은 일을 겪었다. 이제야 겨우 자아 탐색 등을 겪으며 사춘기를 나고 있는데, 비단 내가 서른 살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나 보다. 온 가족이 그랬다. 각자의 상황이 요동치는 가족들 틈에서 서로 할퀴고 또 할퀴어지다 보니 속상해하는 시간이 많았다. 나만 상처 난 것이 아니기에 나만 돌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사이 여름은 흐르고 있었다.
여름뿐만 아니라 사계절도 지났다. 이직한 지 일년이 되어가는 회사에서 나는 다시 회색 인간이 되어갔다. 출퇴근길이 배로 늘어난 것, 또래 동료가 없다는 것, 경험을 쌓기 힘든 업무 환경 등 갖가지 이유들이 있었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역시나 버틸 수 없는 상사였다. 나와 띠동갑이 차이나는 그는, '강약약강' 그 자체인 데다 요즘 베스트셀러의 제목처럼 기분이 곧 태도가 되는 사람이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별다른 업무가 없는 날에도 늘 긴장을 해야 해서 퇴근 시간이 되면 말 그대로 온몸에 진이 다 빠졌다. 그렇게 경직된 상황에 정신적 피로만 쌓이는 계절에서 감히 수박은 생각할 틈도 없었던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흥미도 없는 일을 하며, 늘 내가 폐를 끼치는 존재가 아닐까 전전하며 다니던 회사. 그러면서도 퇴근 후의 시간까지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욕심으로 공부를 게을리하고, 또 다시 뒤쳐지는 것 같은 불안함에 휩쌓였다. 몇 년 뒤의 나를 상상해보니 앞이 깜깜했다. 크고 작은 재미와 감정까지 다 놓치고 나는 과연 무얼 얻게 될까. 이런 고민을 기회가 되는 대로 나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묻다 보니, 욕심나는 일이 있었다. 늘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여겼던 내가 나도 모르게 꽁꽁 숨겨두었던 마음을 발견한 것이다. 다만 그 마음의 끈을 풀어보기 위해서는 익숙해진 갑갑함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는 직장이라는 사실 외에는 모든 면에서 당장 관두는 것이 맞다. 생각대로만 된다면 수박은 물론이요,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맛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럼 절로 나의 계절이 올 것만 같은 거다. 하지만 계획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된다면 수박은 커녕 끼니조차 제대로 먹지 못할까 걱정이다.
도대체 이런 결정에는 어느 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걸까? 그 대가는 쓸까, 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