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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규리 Feb 17. 2022

조용한 수다

 서른한 살의 가출. 삼일 차.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아침에 물 한잔 먹지 못한 채 시작한 하루. 벌써 오후 다섯 시가 지났다. 숨을 고르려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차를 한잔 시켰다. 기다란 소파 위의 사람들 사이 적당한 틈으로 자리를 잡았다. 차를 한 모금 넘긴 뒤 창밖을 바라본다.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차의 뜨고운 온도가 느껴진다. 많은 일이 있었고, 내 마음의 방들 중 어떤 문은 굳게 잠겼다.


 괜시리 서글픈 생각에 잠기는 나를 경계하며 책을 폈다. 좋은 문장을 보면 황홀하면서도 부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과연 이런 울림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데 옆 자리에서 방해음이 들린다. 갑자기 풉 웃기도 하고 손등을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분명 점잖은 아저씨 혼자였는데. 차를 마시는 척 고개를 들어 곁눈질을 했다. 몇 번을 힐끗거린 뒤에야 아저씨가 수화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벌써 20분이 넘도록 영상통화를 하는 그는 가슴을 쾅쾅 치기도 하고 손등을 찰싹찰싹 부딪히기도 하며 중간중간 실소를 터트린다. 손을 바삐 움직이는 바람에 셔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멈추질 않고, 이 글을 쓰는 내내 손동작을 쉬지 않는 걸 보니 아저씨는 수다쟁이임이 분명했다. 들리지는 않아도 듣는 사람까지 기분 좋아지는 대화였다.


 한편 저들의 피부에 닿을 만큼 느껴질 기술의 발전이 새삼스럽다. 우리에겐 그저 옵션 같은 기술일지라도, 그들에겐 기본을 충족시켜주는 기술일 것이다.


 당장  현실이 거지 같아도, 그저 옆자리에 앉았을 뿐인 아저씨의 해맑은 웃음을 보고 따뜻해지는  보니 내가 아직 바닥까지   아니구나, 잠시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다시  속으로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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