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한 살의 가출. 삼일 차.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아침에 물 한잔 먹지 못한 채 시작한 하루. 벌써 오후 다섯 시가 지났다. 숨을 고르려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차를 한잔 시켰다. 기다란 소파 위의 사람들 사이 적당한 틈으로 자리를 잡았다. 차를 한 모금 넘긴 뒤 창밖을 바라본다.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차의 뜨고운 온도가 느껴진다. 많은 일이 있었고, 내 마음의 방들 중 어떤 문은 굳게 잠겼다.
괜시리 서글픈 생각에 잠기는 나를 경계하며 책을 폈다. 좋은 문장을 보면 황홀하면서도 부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과연 이런 울림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데 옆 자리에서 방해음이 들린다. 갑자기 풉 웃기도 하고 손등을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분명 점잖은 아저씨 혼자였는데. 차를 마시는 척 고개를 들어 곁눈질을 했다. 몇 번을 힐끗거린 뒤에야 아저씨가 수화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벌써 20분이 넘도록 영상통화를 하는 그는 가슴을 쾅쾅 치기도 하고 손등을 찰싹찰싹 부딪히기도 하며 중간중간 실소를 터트린다. 손을 바삐 움직이는 바람에 셔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멈추질 않고, 이 글을 쓰는 내내 손동작을 쉬지 않는 걸 보니 아저씨는 수다쟁이임이 분명했다. 들리지는 않아도 듣는 사람까지 기분 좋아지는 대화였다.
한편 저들의 피부에 닿을 만큼 느껴질 기술의 발전이 새삼스럽다. 우리에겐 그저 옵션 같은 기술일지라도, 그들에겐 기본을 충족시켜주는 기술일 것이다.
당장 내 현실이 거지 같아도, 그저 옆자리에 앉았을 뿐인 아저씨의 해맑은 웃음을 보고 따뜻해지는 걸 보니 내가 아직 바닥까지 간 건 아니구나, 잠시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다시 책 속으로 도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