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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평선 틀기 Dec 28. 2023

<드라이브 마이 카> 예술이라는 거울 속 치유


2023.12.21



2023년, 올해는 내가 양적으로 영화를 많이 보기 시작한 첫 해다. 영화관에 자주 갔다. 어쩌면 영화보다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좋아서 무작정 예매를 해 버린 때도 많았던 듯하다. 모두가 같은 스크린을 응시하며, 같은 배경과, 같은 인물에 몰입하는 러닝타임 만큼은, 오롯이 나와 영화만 존재할 수 있어 좋았다. 이렇듯 합법적 침묵이 가능한 영화관은 내게 쉼터이자 균형을 잡아가는 공간이다. 그렇게 한 해 동안 관람한 영화가 차곡차곡 쌓여, 오늘까지 딱 80편이 되었고 영화관에서 본 영화는 38편이다. 올해 본 영화의 절반은 극장에서 본 셈이다.


사실 먼저 한 얘기는 <드라이브 마이 카>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다. 기록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다. 처음으로 영화를 많이 본 해인데, 오 점 평점 이외에 별다른 기록이 남지 않은 게 아쉬웠다. 영화를 보고 떠도는 감정들을 꾹꾹 눌러줄 필요가 있었는데 말이다. 언어화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이제라도 생각과 감정들을 언어화하고자 한다. 짧게든 길게든. 영화를 본 직후라 들뜨고 미숙해서 서투른 언어이든, 관조의 시간을 거쳐 곱씹어 볼 수 있는 차분한 언어이든. '감정의 언어화' 첫번째 기록은 어제 관람한 <드라이브 마이 카>이다.


*이 글은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 개봉 2주년 겸,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개봉이 내년으로 다가와서인지 최근 재상영을 하는 곳들이 종종 있다. 일본 영화의 미래로 불리고 있는 천재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이지만 그의 영화를 이번에 처음 봤다. 관람하고 하루가 지난 지금, <드라이브 마이 카>의 여운은 세 시간의 러닝타임만큼이나 길며, 시간이 지날수록 온기가 잔잔히 퍼진다.



차를 타고 함께 달려 나가는 세 시간


플롯은 단순하다. 연극 배우인 주인공 가후쿠는 아내 오토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자상한 남편이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한 계기로 아내 오토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가후쿠는 현장을 덮쳐 잘못을 캐묻기 보단, 조용히 물러서 침묵하는 것을 택한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살아가다가, 어느날 오토는 가후쿠에게 저녁에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로 가후쿠의 출근길을 배웅한다. 가후쿠는 아내가 자신의 불륜을 이실직고할 것이라 직감적으로 예견했다. 마주하기 싫은 아내의 고백에 집 근처를 빙빙 돌다 마침내 저녁에 들어간 집에서, 가후쿠가 마주한 것은 아내의 죽음이었다. 타살도 자살도 아닌 그저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시간이 흘러 이 년 후, 가후쿠는 후쿠시마 연극제에 올라갈 연극의 연출을 맡게 된다. 그리고 운영기관에서 규정에 따라 배당해 준 운전기사 미사키를 만나게 된다. 미사키는 연극제 준비 기간 내내 가후쿠를 태우고 어디든 달린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주인공 가후쿠가 연극 단원들과 함께 연극제를 준비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한편, 미사키와 함께 차를 타고 달리며 그 동안 회피해왔던 상처를 마주하며 서로가 서로를 치유해 나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세 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은, <드라이브 마이 카> 속 인물과 함께 호흡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들여다 봐야 하는 건 자신의 마음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핵심 인물 중 또 다른 한 명은 다카쓰키이다. 가후쿠의 아내 오토는 TV 드라마 작가로, 작품을 쓸 때마다 출연 배우와 불륜을 저지르곤 했는데, 다카쓰키는 오토가 마지막으로 불륜 관계를 가졌던 인물이다. 그런데 다카쓰키는 가후쿠가 연출을 맡은 연극에 지원해 배우로서 연극 준비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가후쿠의 입장에서 다카쓰키는 악인이다. 죽은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던 남자이니 말이다. 연극 오디션을 볼 때에도, 연극 연습을 할 때도, 다카쓰키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가후쿠가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 다카쓰키가 가후쿠에게 '자신의 마음부터 들여다보라'고 일갈하며 관객들에게도 뜻밖의 위로를 전한다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가후쿠는 아내의 생전에 그녀를 잃게 될까 두려워 아내의 불륜을 그저 덮었다. 오토가 죽은 후에는 마주하기 더 어려워진 과거의 현실에 상처의 회피를 택했다. 가후쿠는 배신감과 실망감, 울분과 분노를 인지하고 토로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후쿠에게 필요했던 건, 자기 마음에 솔직히 귀 기울여 상처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다카쓰키는 달리는 차 안에서 가후쿠에게, 관객들에게 '타인을 보기 전에 나를 먼저 보라'고 힘주어 말한다.


올해 나온 <파벨만스>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그러하듯이, 자전적 이야기가 대단하다 느껴지는 이유는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대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당장 문제가 벌어졌을 땐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해결한 후에 남은 상흔을 관리하는 것 또한 너무도 큰 에너지가 든다. 그 고통을 겪느니 상처를 회피하겠다는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아주 많다. 하지만 자신을 괴롭히는 상처는 언젠가 분명히 마주하게 되어 있다. 일시적으로 단절해 낸 것 같아도,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올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해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과 '능숙하게, 솔직하게 타협'해 나갈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똑바로, 깊이 지켜볼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의 행동도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


가후쿠의 운전수로 일하는 미사키는 극 중반부까지 가후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차를 타고 달리며 그녀의 이야기도 조금씩 풀려간다. 미사키 역시 안타까운 과거사가 존재하는 인물이다. 미사키는 어린시절 엄마에게 맞으며 컸고, 고향 집에서 산사태가 일어났을 때 집에 엄마를 남겨둔 채 홀로 빠져나왔다. 죽음이 몰려오던 순간, 애증이 공존했던 엄마를 내버려두고 나왔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는 인물이다.



설원 위에서 미사키가 가후쿠에게 고백하는 이야기에 화답하듯, 가후쿠는 처음으로 오토에 관한 솔직한 마음을 꺼내 보인다. 솔직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오토에게 화를 내고, 그녀를 책망하고 싶다고. 그런데 이제 그러지 못하게 됐다고. 하얀 눈 위에 털어놓은 미사키와 가후쿠의 이야기를 덮어주는 것은 살아남은 이들끼리의 따뜻한 포옹이다. 생에 남겨진 사람들은 괜찮을 거라고 서로를 다독이며, 그저 꿋꿋이 살아가는, 최선의 위로.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해. 어떤 형태로든 그게 계속되지.
나와 너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 살아가야 해.
괜찮아.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 눈밭에서,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연극과 가후쿠, 영화와 관객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가 상처를 다루어가는 또 다른 방법은, 극중에선 연극으로 표현되는 '예술'이다. 가후쿠는 후쿠시마 연극제로 단원들과 함께 <바냐 아저씨> 연극을 준비하는데, 연극 연출을 맡고 마지막 상연 때에는 직접 '바냐' 역을 맡아 연기하며 자신과 다시 마주하는 경험을 한다.


특이한 점은 가후쿠가 모은 <바냐 아저씨>의 단원들은 일본, 대만, 한국 등 국적이 다양하며, 극에서 구사하는 언어도 일본어로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각 배우에게 익숙한 일본어, 한국어, 대만어, 수어를 모두 섞어 연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원들 간 꾸준한 연습과 소통을 통해, 그들의 연극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함께 호흡하는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로 거듭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영화 후반부의 <바냐 아저씨> 연극제 무대에서 바냐 아저씨가 된 가후쿠와, 조카 소냐를 연기하는 유나가 대화하는 장면이다. 삶이 괴롭다는 바냐 삼촌에게 조카 소냐는 수어로 말한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 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 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릴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열렬히, 가슴 뜨겁게 믿어요.
그때가 오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 <바냐 아저씨> 연극 中


실존주의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태어난 이상 무수한 선택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다. 부조리로 가득 찬 삶을 온전히 수용하며, 삶이라는 존재 자체를 삶의 이유로 삼아 이어 나가야만 할 수도 있다. 소냐가 바냐 삼촌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그저 인내로 삶을 이어 나갈 뿐이며, 먼 훗날 미소 지으며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때, 비로소 편안히 쉬게 된다.


당신의 삶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달콤하고 막연한 위로보다 이 말이 더 위로가 되는 까닭은, 그저 하루를 '잘' 살아내면 잘 사는 인생이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 시련이 삶에서 위치한 맥락을 찾아 헤매며 아파하기 보단, 그래서 희망적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한탄하며 시간을 흘려 보내기 보단, 삶은 원래 그런 것, 그러니 조금 덜 아파하며 하루하루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건조하고 가장 깊은 위로 말이다.


이러한 소냐의 말을 듣는 것은 바냐이기도 하지만 가후쿠이기도 하고,  동시에 <바냐 아저씨>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들이기도 하며, 이 연극을 영화로 보고 있는 나와 같은 관객들이기도 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극중 <바냐 아저씨>라는 연극을 통해 예술이 우리 삶에 주는 힘을 체험하게 해 준다. 


가후쿠는 바냐 역할을 빌려 자신의 인생의 괴로움을 재연하고, 괴로움을 안고도 삶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위로를 소냐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다. <바냐 아저씨> 연극을 보는 관객들, 그리고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는 우리 관객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상처를 비춰본다. 그리고 배우들의 입을 통해 삶의 위로를 건네 받는다. 우리는 모두 예술이라는 거울 속에서 깊은 치유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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