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첫 영화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열정>으로 시작한다. <열정>은 하마구치 류스케가 영상 대학원 졸업과제로 찍은 작품으로, 2008년 작이다. OTT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영화이기에 기획전이 열리면 꼭 보러 가리라, 벼르다가 라이카 시네마에서 기획전 예매가 오픈된 직후 바로 예매해놨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드라이브 마이 카>로 류스케를 좋아하게 됐지만 <열정>은 너무 힘들었던 작품이었다. 감정적으로 힘들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과 추악할 정도로 솔직한 이중성이 적나라한 대사들 사이로 엮여 나와 감정 소모 한번 제대로 하는 영화다. 카호(교사, 포스터 여자), 토모야(사업가, 포스터 남자), 켄이치로(카호를 사랑하는 남자), 타케시(유부남), 타카코(숏컷 여자), 이렇게 다섯 남녀의 관계가 진실을 마주해가며 복잡하게 뒤얽히는 이야기이다. 아, 에릭 로메르를 존경한다는 류스케답게 인물들 대사가 꽤 많다.
인물 관계가 너무 복잡한 만큼 정리를 먼저 해 두자면. 카호와 토모야는 10년 간 사귄 연인으로, 극 초반에 친구들 앞에서 결혼 발표를 한다. 켄이치로는 카호를 꾸준히 사랑하고 있는 인물로, 둘의 결혼 발표 당시 대놓고 불쾌한 감정을 표하기도 한다. 타케시는 친구들 중 유일하게 결혼을 한 인물로, 아내가 임신해 곧 아빠가 될 사람이다. 타카코는 켄이치로와 만나고 있는 여자로, 토모야의 친구이기도 하며 <열정>의 첫 장면(고양이 무덤)에 켄이치로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남녀들끼리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다. 결혼 발표 후 토모야를 포함해 켄이치로, 타케시 세 남자는 타카코의 집에 모여 2차를 하게 되는데. 타케시는 타카코 집에 방문한 타카코의 이모(?)에게 끌려 정신적 바람을 피게 되고, 친구들 앞에서 그녀에게 끌렸단 사실을 인정한다. 이번엔 얘네. 토모야는 타카코와 키스를 한다. 그리고 몇 년 전엔 관계를 가진 적도 있다고 친구들 앞에서 고백. 이처럼 <열정>에선 겉으로는 견고해보였던 각자의 사랑 뒤에 숨겨두었던 진실이 하나 둘씩 드러난다.
이를 두고 서로 추악하다며 비난하다가 몸싸움으로 번지기까지 하는데, 타케시는 곧 결혼할 토모야를 마음에 둔 듯한 타카코에게 정신을 차려야 한다며 그녀를 화장실로 데려가 샤워기로 물을 뿌리다가 갑자기 그녀에게 키스한다. 그리고 타카코도 저항하지 않고 타케시와 애정 행각을 벌인다. 이 모든 걸 지켜보다 결국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토모야까지. 영화 속 이 남녀들의 관계는 이들이 사랑을 함에 있어 상당히 동물적이고 가볍게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 불쾌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제 가장 중요한 카호 이야기. <열정>에서 개인이 중심이 되는 시퀀스를 가져간 유일한 인물이 바로 카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에서의 ‘폭력’ 토론 씬은 깊이 곱씹어볼 만하다. 카호는 학교 교사인데 학급에서 학생 한 명이 급우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다 자살한 일이 발생한다. 이에 카호는 학생들을 계도하기 위해 폭력에 관한 토론을 시작한다. 그녀는 폭력을 ‘외부에서 오는 폭력’과 ‘내부에서 오는 폭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며, 외부에서 오는 폭력은 막을 수 없어도 내부의 폭력, 즉 자신이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폭력은 수용하여 용서하고, 대신 자기 자신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참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주장은 학생들에 의해 이내 무너지고 만다. 자살한 학생에게 폭력을 가한 가해자는 한 명이 아닌, 학급생 전원이었기 때문이다.
카호의 학급에서의 폭력 토론은 어렵지만 분명 다섯 남녀의 사랑 관계를 설명하는 열쇠가 되는 것도 같다. 폭력을 당해도 그저 용서하라는 카호의 설득은 학생들에 의해 좌절된다. 나 역시 카호가 한 말은 폭력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해야 하나?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다만 폭력을 무작정 용서하고 없던 일로 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으니, 진실을 고백하고 그를 마주하는 것부터가 폭력을 해결하는 첫걸음이란 생각이 든다. 이는 다섯 남녀가 자신들의 사랑 관계에 관해 진실을 마주해가는 과정과 일맥상통한다. 이들이 자신의 연인 뒤에 숨겨두었던 그 무시무시한 진실들을 더 오래 덮어두었다면? 더 끔찍했다고 본다. <열정>은 폭력과 같은 진실을 털어놓으며 이를 마주해가는 다섯 남녀를 보여준다. 두려운 진실은 마냥 덮을 것이 아니라, 미루지 말고 마주해야 함을 이야기 한다.
한편 켄이치로는 카호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고백하며 그녀를 향한 진심어린 사랑을 표현한다. 하지만 카호는 토모야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집에서 다시 만난 토모야에게 그가 잠시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는 고백과 함께 이별을 고해 듣지만, 다시 돌아와 한번 더 기회를 달라는 토모야를 받아준다.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만 사실 카호와 토모야는 얼마 못 가 헤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진실을 마주했기에 후회없이 관계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영화는 남녀의 부정한 사랑이나 바람직한 연인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에 있어 ‘진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목이 열정인 이유는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열정적인 사랑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은 알겠다. 아마 진실을 열정적으로 고백하고 마주하라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사실 정신이 조금 나갈 것 같은(…) 영화였다. 작품으로서 영화가 싫었다기 보단 연대와 성장을 바탕으로 하는 성장 서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보기가 조금 괴로웠달까. 진실을 마주하는 고통을 관객에게도 느끼게 하려는 것이 의도였다면 류스케 당신은 천재로 인정. <우연과 상상>, <해피 아워>가 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쓰다보니 느낀 것인데, <열정> 이 영화, 류스케에 대해 알아가기엔 좋았던 작품이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도 그렇고 그는 오래 전부터 꾸준히 말해오고 있는 것 같다. 진실을 마주하고, 인정하며, 해결해, 다시 살아갈 용기가 중요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