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는 과연 힐링 영화일까?
포스터 속에서 밝게 웃고 있는 주인공 히라야마, 옆에서 함께 환히 웃고 있는 그의 조카 니코, 푸른 나무 배경 위 써 있는 따뜻한 카피. '당신의 하루는 어떤 기쁨으로 채워져 있나요?' 포스터를 보면 이 영화는 마치 하루하루를 기쁨 가득히 보내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힐링물인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이후 이 포스터가 보여주는 주인공의 삶은 아주 일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어린 조카와 함께 아름다운 하루를 보내는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도 그렇지만, 독립예술 영화들의 마케팅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 한달까. 하지만 '영화 역시 창작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예술이 아닌 상품이고, 봐 주는 관객이 없을 땐 예술이라는 이름에 도달하기도 전에 상품으로서 외면 받는다'는 관점에서 마케팅의 본질에 순응하는 것이라면, 이해해야만 하는 것 같다. 영화 마케팅이란 게 원래 다 그런 과대포장이 아닌가 싶다.
*이 글은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줄거리와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히라야마의 하루는 오늘이 어제를 복사한 듯 똑같다. 창문 너머로 빗자루 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양치를 하고, 콧수염을 다듬고, 화분에 물을 뿌리고, 옷을 챙겨 나와,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들고, 차를 끌고 일터로 나간다. 일터라 함은 시내의 공중화장실. 히라야마의 직업은 화장실 청소부다. 때문에 영화 초반부는 마치 청소부 히라야마의 삼일치 브이로그를 보는 것 같다. 이 부분에서 반복되는 그의 일상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텐데,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발생하는 심심한 오차들이 그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을 조금 재미있게 만들어 주었다.
청소부로서 히라야마는 굉장히 성실하다. 세면대부터 변기, 벽 틈새, 거울, 쓰레기 처리까지 빈틈없이 소화해낸다. 히라야마는 동료 청소부와도 좀처럼 잡담을 나누지 않을 정도로 과묵하지만, 타인에게 한없이 상냥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길을 잃을 뻔한 아들을 화장실에서 찾아 데려다 주었는데도 청소부 행색을 보곤 벌레 보듯 인상을 찌푸리는 아이의 엄마 앞에서도 히라야마는 아이를 향해 다정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공원에서 점심으로 매일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을 때마다 마주치는 옆 벤치의 여자 회사원(은행원으로 추측)에게도 늘 가벼운 묵언의 인사를 건넨다. 물론 상대의 반응은 '당신 누군데 자꾸 나한테 인사해'다.
히라야마는 나무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화장실을 청소하다가도 갑자기 이용객이 들어와 청소를 잠시 멈춰야 할 때면 바깥에 서서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보곤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다. 공원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나무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본다. 그리곤 필름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주말에는 사진 현상소에 가서 이 필름들을 인화해 온 후, 잘 나온 사진들은 따로 추려 상자에 보관해둔다. 이렇게 매년 모아 온 사진 박스들은 그의 벽장 안에 그득하다.
퇴근 후 히라야마는 목욕탕에 가서 하루의 피로를 푼다. 그리고 역사 안에 있는 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한다. 여유가 있는 날은 단골 이자카야에 가서 조금 더 맛있는 식사를 즐기고, 다른 단골 손님들과 함께 여사장의 고운 노래를 듣기도 한다.
반복되는 그의 퇴근 후 행적만큼이나 그의 행선지에 머물러 있는 사물과 사람도 한결같다. 스크린 너머로 느껴지는 뜨끈한 목욕탕 온천의 온도라던가, 목욕탕의 할아버지들이라던가, 역사 식당의 사장님, 혹은 그 사장님이 식사 전에 주는 시원한 아이스 컵 같은 것.
<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일상의 제자리에 위치해 매일 같은 모습으로 굴러가는 모든 것들을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집에 돌아온 히라야마는 램프만 켜 두고 좋아하는 문학을 읽다가 다시 찾아올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든다. 잠에 빠져든 그의 머릿속에선 그날 하루의 기억들이 그가 기록한 필름처럼 회색빛으로 일렁이다 사라진다.
히라야마의 매일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여기까지 보면 히라야마의 하루는 제목 그대로 '퍼펙트 데이', 정말 완벽한 하루인 것 같다. 낮에는 성실히 일하고, 일하는 사이사이 싱그러운 나무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고, 퇴근 후에는 편안한 식사를 즐기고 밤에는 독서를 즐기다 잠에 드는 일상. '소확행'에 대한 수요가 멈출 줄 모르는 지금의 시대에 안성맞춤인 힐링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상술했듯 이 영화는 힐링영화가 아니다. 평온해 보이는 히라야마의 일상에도 오차가 생기는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면 그 균열은 너무도 미세해 '그의 삶은 평온하다'는 명제를 부술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관객으로서 히라야마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 보는 우리는 그 균열이 느껴진다. 잔잔해 보이는 그의 삶도 결국은 불안과 함께 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조카 니코의 등장으로 히라야마의 일상에 변주가 생기기 시작한다. 니코는 엄마와 다툰 후 가출해 삼촌의 집에 찾아온다. 나이다운 시니컬함이 있으면서도,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는 아이다. 히라야마가 일 하는 곳에 따라가서 삼촌 청소도 돕고, 삼촌을 헤아리는 눈빛도 비치기도 한다. 한편 결국 니코를 데리러 온 엄마(히라야마의 여동생)에 의해 히라야마의 과거에 어둠이 있었음이 암시된다. 여동생의 차림새나 기사를 대동해 다니는 모습 등으로 유추해 볼 때 히라야마 역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듯하고, 지금은 요양원에 가 있는 아버지 이야기에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보아 큰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 아무래도 아버지와의 어떤 갈등으로 기존의 삶을 벗어던지고 청소부로서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에선 이 정도의 암시를 제외하곤 히라야마의 과거에 대해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 그래서 히라야마의 과거에 궁금증이 생기긴 했지만, 나 자신을 '히라야마를 관찰하는 관객'이 아닌 '히라야마의 삶을 보고 공유 받는 한 인간'이라 생각하면 그의 과거를 굳이 캐묻고 싶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얼굴에 그늘이 진 것 같아도 불안을 캐묻지 않고 '힘들구나' 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히라야마의 과거에 대한 불안 그 자체를 궁금해하기 보다는 그 불안을 대해 가는 히라야마의 삶의 모습에 조금 더 시선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조카와 자전거를 타며 함께 외치던 그 말처럼.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
히라야마는 고독하게 살아간다. 가족과 절연하고 혼자 살아가고 있으며, 배우자나 자녀도 없고,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도 없다. 그런 그의 삶을 채워주는 사람들은 '왔다가 떠나는' 사람들 뿐이다. 동료 청소부인 타카시와 그의 여자친구 아야는 반 막무가내(?)로 히라야마의 차를 빌려타고 이동하는 좌충우돌기를 보인다. 그 과정에서 타카시는 히라야마의 테이프를 팔아 돈을 벌기 위해 그의 테이프를 들고 술래잡기를 하기도 하고, 히라야마의 테이프에 푹 빠진 아야의 모습은 히라야마에게 은밀한 뿌듯함을 주기도 한다.
어느날 불쑥 나타난 조카 니코와 같이 타카시와 아야는 히라야마의 삶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긴장감과 재미를 더해준다. 하지만 히라야마에게 일을 그만 둔다는 인사를 전화 한 통에 남기고 떠나는 타카시를 보며, 가끔씩 찾아오는 일상의 변주도 결국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홀연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는 허무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히라야마가 단골로 방문하던 이자카야 사장의 전남편과의 만남도 그러하다. 알고보니 히라야마는 사장을 마음에 품고 있었는지(?) 그녀가 의문의 남성과 포옹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곤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황급히 자리를 뜬다. 그리곤 강가에 가서 잘 하지도 않는 캔맥주를 들이키고, 제대로 피지도 못하는 담배를 피며 상당히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전남편으로 밝혀진 그 남성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을 때에는 사장과 아무 사이 아니라며 극구 부인한다.
대신 히라야마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남자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고, 그와 초등학생 마냥 그림자 놀이를 즐긴다. "그림자끼리 겹쳐지면 더 어두워질까요?"라는 남자의 물음에 히라야마는 몸소 그림자를 겹쳐 보이고, 더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위로를 건넨다. 낯선 타인과 불안으로 연대하는 온정 어린 장면이었지만, 한편으론 히라야마의 불안이 타인의 불안 앞에서 한 발 물러서, 다시 가려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 잔잔해 보일 뿐, 히라야마 역시 고독과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다음날 아침 그의 출근길에서 보여진다.
여느날과 같이 팝송을 크게 틀고 달리는 출근길이지만, 히라야마는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표정으로 운전을 한다. 반복되는 일상. 고독한 하루하루. 때때로 상기되는 과거의 아픔. 선물처럼 찾아왔다가도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사람들. 평온하다고 정의하기에는 히라야마의 잔잔한 인생 속에도 불안이 가득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불안을 품은 하루, 그러니까 지겨운 하루는 태양과 함께 또 밝아온다. 플롯만 놓고 보면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히라야마의 하루는 점점 안 좋아진다. 그런데 불안은 없다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늘 있었지만 이따금씩 삐져나오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 장면에서 히라야마의 눈가로부터 삐져나오는 그의 눈물처럼 말이다.
불타는 태양과 평행하게 달려 나가는 히라야마의 차를 보며, 히라야마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불안과 평행하게 달리는 인생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언제 삐져 나올지 모르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하루가 싫다고 해서 우리는 해가 다시 밝아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저 태양과 함께 떠오르는 매일의 불안을 받아들이며, 근근이 버텨 나가는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며 <시지프 신화>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라야마의 삶은 시시포스의 삶과 같구나. 꼭대기까지 굴려 올려 놓아도 내리막길을 따라 다시 굴러 내려 오는 시시포스의 거대한 돌처럼, 우리의 불안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거대한 돌이 다시 굴러 내려 올 것을 알면서도 꼭대기까지 고통스럽게 돌을 굴리는 시시포스처럼, 우리는 불안을 짊어지는 매일을 살아가는 것이다.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인생이라면,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기대고 살아가야 할까? 영화는 관객에게 교훈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도구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김없이 이 질문에 대해 오래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내 나름대로 근래에 내린 결론은 '반복 속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시작할 때 영화 마케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둥 포스터의 카피를 신랄하게 비판하긴 했지만, 겸연쩍게도 그 논리 역시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히라야마는 분명 아픔과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주어진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고, 당연해 보일 수 있는 일상의 풍경에 감사하며 하루를 소중히 대한다. 결국 불안을 이겨내는 힘은, 지겨움이라는 부정 어린 단어로 왜곡된 '반복'에 만족하는 데서 오지 않나 싶다.
이 영화를 보고 오랜만에 영화 <패터슨> 생각이 났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 봐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그 영화에서 나는 어떠한 허무를 느꼈다. 귀여운 아내와 함께 살아가며 시를 쓰는 잔잔한 삶, 반복되는 월, 화, 수, ... 속에서 패터슨의 권태를, 불안을 보았던 것일까. 그때 패터슨은 어떻게 하루를 살아냈었나. 패터슨은 자신의 삶에 던져진 질문에 어떠한 답을 했었던가..오랜만에 <패터슨>을 다시 보고 싶어졌다.
영화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음악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라는 점이다. <퍼펙트 데이즈> 속 히라야마의 플레이리스트는 대부분 올드팝이다. 운이 좋게도 히라야마와 나의 취향이 비슷해서 이번 사운드트랙을 아주 즐겁게 감상했다. Lou Reed의 Perfect Day는 거의 주제곡 아닌가.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에 삽입된 Nina Simone의 Feeling Good은 두 시간 가량을 달려 온 <퍼펙트 데이즈> 속 히라야마, 그러니까 우리네 인생 이야기를 노래하는 곡으로 탁월하다고 느꼈다. 좋은 영화였다.
It's a new dawn
새로운 새벽이야
It's a new day
새로운 날이야
It's a new life
새로 열린 인생이야
For me
나에겐
-Nina Simone, Feeling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