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아아 청춘은 머물지 않아라.
흐르는 물같이도 서늘하게
지는 꽃같이도 애달프게
사람의 청춘은 간다.
아아 청춘은 이 홑몸의 생인 물결에
한 줌의 흙더미.
힘 있게, 생의 물결판에 던져라.
몸서리치게.
KBS2 <오월의 청춘> 이후로 감정소모가 심한 시대극은 잠시 거리를 뒀었는데, MBC <연인> 을 시작으로 다시 시대극에 빠져있는 요즘이다. 드라마는 무조건 '요약본 아닌 정주행'을 선호하는 나지만, 15부작 이상의 작품들을 계속 달리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 잊고 있던 단막극이 생각났다. SBS에서 방영한 지 벌써 5년이 된 <사의 찬미>를 이제야 보게 됐다.
<사의 찬미>는 회차 당 30분, 총 6부작의 단막극이다. 방영 당시에는 하루에 2부씩 총 삼일에 걸쳐 공개됐다. SBS가 타 지상파 방송사에 양해를 구하고 처음으로 넷플릭스에 공급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시대극 특성상 높은 제작비에 비해 단막극 방영으론 광고 수익이 나지 않아, 넷플릭스 투자액으로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5년 새에 한국 콘텐츠의 인기가 크게 올랐으니, 로맨스가 가미된 한국 시대극 수요가 많은 동남아권에서 현재 스트리밍율이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유통 뒷이야기는 이쯤으로.
원래부터 뮤지컬 <사의 찬미>를 열렬히 좋아하던 친구 덕에 '사찬'의 명성은 익히 들었었다. 다만 본래 극 <사의 찬미>는 윤심덕의 서사에 초점을 맞춘 반면, 드라마 <사의 찬미>는 연인으로서 김우진과 윤심덕 두 인물의 서사를 그리기 때문에 기존 극의 팬들이 아쉬워 하는 반응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사실 기존 뮤지컬을 보지 않아 윤심덕이나 김우진 중 한 인물에 경중을 두지 않던 나로서는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감상했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처음 만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 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었지만, 그들이 떨어져 있는 동안의 애닳음을 여러 회차에 걸쳐 자잘하게 보여주기 보단 단막극 안에서 굵직하고 여백 있게 남긴 것이 더 좋았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영상미와 의상의 아름다움이 흠 잡을 데 없이 좋다. 이 덕에 영화같은 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종석이 이렇게 연기를 잘 하는 줄은 몰랐다. 4화 후반부에 우진이 아버지에게 참고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고 싶다. 삶에서 선택에 대한 자유가 없는 인물이 인간으로서 자유의지를 주장하고 되찾기 위해 온몸으로 부르짖는 과정이리라. 극 내내 우울감이 짙게 깔려 과묵한 톤을 유지하다가 처음으로 크게 분노하는 우진을 보며, '참고 있다고 괜찮은 것이 아닌' 누군가의 마음들을 너무도 잘 표현해 준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구성 중 아쉬운 점이 있다면 중심 인물 주변의 캐릭터들이 너무 가장자리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홍난파(이지훈 배우)는 우진과 심덕의 매개인이 돼 준 인물에 그쳤다는 점이 아쉬웠다. 심덕을 남 몰래 마음에 두고 있는 설정 또한 전개상 꼭 필요했던 부분은 아닌 것 같아 서사가 다소 얄팍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이건 드라마 <사의 찬미>가 그만큼 심덕과 우진의 서사에 집중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시대의 비극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여타 시대극에 비해 덜 도드라지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듯하다.
<사의 찬미> 에서는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이들의 역설적인 사연이 와 닿는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영원을 꿈꾸는 죽음뿐이다. 이 비극적인 역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지켜보는, 역시 오도 가도 못 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왠지 모를 위로가 된다.
알베르 카뮈는 삶의 부조리와 무의미를 인정하는 것이 삶에 대한 반항이고, 인간은 그때야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된다고 말했다. 한때 삶의 무의미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나는 카뮈의 철학에 동의하며 의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진한 허무주의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오도 가도 못하는 삶의 부조리를 견디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사의 찬미> 인물 소개에도 나와있듯 우진에게 심덕은 이상 그 자체이고, 그렇기에 그녀는 그에게 희망인 동시에 절망이었다. 현실에 발 디디는 한 심덕을 잡을 수 없는 우진은 그 괴리에 대한 절망에 점점 더 깊은 심연으로 빠졌을 것이다.
이는 죽어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두 연인의 슬픈 이야기가 허구일지언정 위로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 윤심덕과 김우진이 연인 관계였는지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영원의 죽음으로써 지키고 싶었던 귀한 생각과 마음은 언제고 있어왔다는 '희망' 말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삶 속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귀한 의미이지 않을까. 삶은 원래 무의미한 것이고 그저 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역으로 반박해 볼 수 있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死의讚美 - 尹心悳(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