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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 Apr 16. 2024

봄 날, 행궁

네 번째 시선


이른 시간부터 뭐가 그리 바쁜지 일찌감치 남자 셋이 차례로 모두 집을 나간 평일 아침, 평소보다 10분 먼저 찾아온 혼자만의 시간에 설렌다. 방학도 끝나고 아이들은 학교에 학원까지 바쁘다 보니 자유시간이 늘어났는데도 항상 짧고 아쉽다. 분주한 아침에 세 남자의 출타가 모두 끝나고 혼자가 되는 가장 즐거운 시간.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등교하느라 이야기하느라 장난치느라 정신없이 다니는 아이들이 보인다. 마음속으로 우리 아이들도 저리 즐겁게 좋은 하루를 보내길 바라며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느껴본다. 유난히 긴 추위와 비바람이 싫어서 해를 만나면 반갑기 그지없다.


대중교통 중에서도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걸 좋아한다. 지하철은 어두컴컴한 터널 속이 가끔 숨이 막히고 어쩌다 좌석에 앉을라치면 나이 드신 분들은 왜 꼭 내 앞에 서서 헛기침을 하고 뭔가를 자꾸 두드려대면서 양보를 강요하는가. 쭈글쭈글 양보는 하지만 몸과 마음이 지칠 때도 있다. 택시는 가까운 공간을 낯선 누군가와 공유하는 상황이 불편했다 나 혼자만. 항상 차를 가지고 운전해서 가던 행궁동을 버스에 몸을 실어 가보기로 했다. 날씨도 좋고 해가 쨍쨍인데 구름 하나 없이 말갛고 파란 하늘이 기분을 더욱 들뜨게 한다. 마치 혼자 여행이라도 가듯 그렇게 달려간다.


아이가 학교를 들어가고 통과의례처럼 1학년 축구부가 만들어지고 엄마들은 단톡방을 만들었다. 아이들끼리도 놀았지만 엄마들끼리 마음이 잘 맞아 카톡으로 이야기도 자주 하고 오프모임도 하며 다양한 나이와 성격들이 모여 무난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어느덧 아이들은 자라 각자 다른 중학교로 뿔뿔이 흩어져 다른 친구들과 더 친밀해졌지만 아이들과 별개로 엄마들끼리 우리들은 잘 지내고 있다. 그러던 중 돌아다니며 놀기 좋아하는 셋이 만나 브런치도 먹고 책방도 가며 재밌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 갑자기 직장이 생긴 E는 바빠졌고 나와 P 만 둘이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가끔 시간 되는 날에 셋이 만나는데 오랜만에 시간이 맞아 직장인의 점심시간을 이용해 약속을 잡았다. 오늘이 그날이다.




버스를 타고 창문으로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풍경들은 설레기보다 안정감을 준다. 추위가 너무 싫은데 이번 겨울은 유난스럽게도 춥고 시린 날이 길어져 힘들었다. 드디어 밝고 따뜻한 봄이 오고 있다. 날씨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몽글거린다. 차창밖으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보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은 날 화성 행궁에 도착했다. 항상 차를 운전해서 왔던 화성행궁의 노선과 달리 버스가 내려 준 정류장은 통닭골목이 있는 시장 쪽과 먹지 않은 화서문 앞. 버스에서 내려 행궁을 바라보니 익숙한 기분과 낯선 기분이 교차한다.


오늘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 이유가 바로 약속 전에 가고 싶었던 도서관 때문이다. 화성 행궁 위 쪽에 위치해 있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하지만 웬만한 장서들이 다 있는 대규모의 도서관이라 너무 좋아하는 곳이다. 자주 오지는 못하지만 가끔 행궁 구경과 같이 즐길 수 있어 여행 오는 기분으로 다녀가는 도서관이다. 이곳 보존서고에만 있는 도서를 대출해 읽으며 잠시나마 여유를 만끽해 본다. 예상보다 약속시간이 빨리 가까워 오기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때문. 짧은 휴식을 뒤로하고 늦지 않게 약속장소로 가야 한다.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하는 성향이라 조금의 여유를 두고 출발해 본다. 도서관 입구 바로 아래 유명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오는 우영우 아빠의 김밥집 촬영지가 있다. 인기가 한창일 때는 줄 서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는데 김밥집이 아닌 다른 메뉴의 음식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이 닫혀 있더니 이번에 보니 정말 김밥집이 되어있는 게 아닌가? 신기해서 들여다보다 주인과 눈치 마주쳤는데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 건가.







P는 선생님의 사정으로 오전에 운동을 해야 한다고 약속시간에 맞춰 자신의 차로 천천히 출발을 하자고 제안했다. 성격 급한 나는 빨리 행궁동으로 가서 도서관도 가고 싶어서 각자 가서 만나자고 했다. 도서관에서 약속장소까지는 걸어서 30분 거리! 그녀들은 택시를 타던 데리러 가게 기다리라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지! 걷는 게 좋다며 대출한 책을 한웅큼 쥐고 신나게 도서관을 빠져나와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급경사를 열심히 등반하여 지도가 가리키는 곳에 도착하자 목적지에는 폐허가 있는 좁은 골목길뿐, 당황하기 시작했다.  길 찾기 전문가에게 이게 무슨 일인가! 둘은 이미 도착했다는데 뜨거워져가는 날씨에 땀이 주르륵 머릿속은 팽그르르 발만 동동거린다. 카톡을 보내다 답답한 그녀들이 전화했다. “언니! 아까 지도 보내줬잖아 그쪽에 문이 없다고 반대쪽 큰길로 오라니까?” 이게 먼 소린가 막다른 골목에 큰길은 또 어디인가?


<내가 간 곳은 노란 동그라미, 원래 가야하는 곳은 검정 동그라미>



가파른 산 길을 내려갔다 반대로 올라갔다 정신을 못 차리는데 걱정이 된 P가 다시 전화를 했다. “언니 나 밖에 나와있어 어디야? 안 보여. 어 저기 보인다. “ 내가 길을 못 찾을까 전화를 들고 큰길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고 다가와 손에 있는 책들을 받아준다. “그냥 거기 있으라니까 데리러 갈 텐데. 무거운 짐을 다 들고 여기까지 걸어온 거야?” 내가 좀 그렇지 막무가내일 때가 있다. 마음이 급해서 기다리는 걸 못한다.




종종 모여서 놀던 셋은 일하는 워킹맘이 된 E와 오랜만에 만남이 못내 반갑다. 매사 밝고 긍정적인 기운을 가득 뿜고 있다. 텐션도 높고 체력도 방전은 되나 궁금할 정도로 항상 즐거워 보이는 그녀는 나름 에너지 충만인 나에게도 넘사벽이다. 반갑게 인사하며 우리가 찾아올 때 헷갈릴까 봐 카톡으로 지도를 두 개나 그려서 보내줬는데 왜 가지 말라 반대로 갔냐고 한다. 분명 지도를 봤는데 운전하는 사람만 해당하는 줄 알았다 변명을 해본다. “언니가 나이가 들어 그런가 봐. 이해해.”


좋은 브런치 가게나 카페를 많이 아는 E의 추천으로 왔는데 일단 가게가 너무 예쁘다. 마지막에 도착한 나는 감탄하고 있는데 미리 와있던 둘이 주문할 메뉴를 고르고 있다. 둘이 결론이 났는지 P가 주문을 완료하고 돌아온다. 뭐든 가리지 않고 먹는 나는 메뉴 선택도 매번 단순하고 선택장애로 힘든데 그녀들은 맛있는 음식을 쏙쏙 잘 골라 주문해서 가만히 있다 즐기면 되니 어찌 좋지 않을까





매장을 찾아올 때 ‘이런데 가게가 있다고?’ 반문하며 왔는데 안으로 들어거자 분위기가 환하고 산뜻해서 예뻤다. 산 위에 있는 데다 통창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풍경을 감상하게 되고 뷰 맛집이라던 방문 전의 대화가 생각났다. 눈으로만 담기 아쉬워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가게의 풍경을 담아본다. 작은 소품들도 아기자기해서 눈길을 끌었다. 남편이나 아이들과 있으면 맨날 가성비 맛집이나 무한리필집이나 다녀야 하는데 어쩌다 한번 있는 여인들의 만남은 맛과 멋을 함께 먹어 행복하다.  음식이 하나같이 색도 예쁘고 모양도 이뻐서 보자마자 감탄사부터 내지른다.




일반적인 접시에 담겨 나오는 게 아니었다. 이런 감각적인 형태로 서빙받을 줄이야. 얼핏 보면 만두나 딤섬이 들어있을 것 같은 대나무 그릇에는 빵과 브런치가 담겨있다. 비범한 비주얼에 감탄하며 어떻게 이쁘게 찍어보나 아까워서 어찌 먹나 마음이 콩닥콩닥. 예술적 감각이 없다 보니 이렇게 특별한 분위기나 데코레이션 같은 감각적인 모든 것에 감탄하며 마음과 머릿속이 온통 부러움으로 가득 찬다.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생각들은 한정되어 정체되어 있는데 이런 아이디어가 나오는 사람들의 머릿속은 예술 작품들로 가득 차 있는 건 아닐까?




인연이란, 인내를 가지고 공과 시간을 들여야 비로소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한 포기 난초이다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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