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시를 읽는다
박완서 산문집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에 있는 시를 발췌해 이성표 일러스트레이터가 시 한 편으로 한 권의 시그림책을 펴낸 것을 보았다. 단순한 푸른색과 연필선으로 열여덟 장의 그림에 시의 내용을 한 줄 한 줄 담아 내어 구절마다 머물러 자신을 거울처럼 비춰 보게 되는 그림책이다.
시그림책의 그림이 가지는 울림의 깊이를 보며 요즘 나의 사진 흉내내기 그림의 한계를 팍팍 느낀다. 그렇게 색감이 단번에 제압하고마는 아우라 있는 분위기를 보다가 시골마당 호미질 같은 나의 색뭉갬을 보면 답답하다. 공부는 없이 같은 지점에 머릴 부딪치며 출구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심보라니, 하지만 게으른 대로 이 길을 좀 더 가보기로...
편안한 문체로 "중산층의 꿈과 중산층의 속물성까지도 예리하게 파헤친(최원식)"다든가, "인간의 오장육부에 숨겨진 위선과 허위의식을 한 치도 숨김없이 태양 아래 까발리고, 공감하게 하고, 그리하여 위로 받게 하던 작가(정이현)"였던 박완서의 시에서도 그 성품이 느껴진다.
시를 읽고 고르고 베끼는 데 시적인 완성도나 멋진 표현보다는, 공감이나 위로가 되거나 현재 내 삶의 의미를 더 하는 시를 찾게 된다. 즉 어려운 시보다는 일상언어에 가까운 쉬운 시를 찾게 되지만 그래도 엣지있고 매력적인 구절에 훅 숨넘어가기를 꿈꾸고, 그런 시를 만나면 고마워하며 잘 맞는 옷 한 벌 얻어 입은 기분을 진하게 느낀다. 좀 더 지나면 나도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겠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오늘 씨 뿌리는 구순 어머니 모습이다. 매년 "내년에도 지을랑가 모르지만, 이거 뿌려 내가 먹을랑가 모르지만" 하시면서 이태 삼 년 전에 받아 놓으신 씨앗을 냉동실 아래 칸에서 꺼내오라 하여 하얗게 모종화분에 뿌리신다.
그러고보니 평생 아마추어 농린이로서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빌빌 따라하며 구시렁구시렁대는 지금 요대로의 구도가 딱 좋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