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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울 May 01. 2024

'스토너'를 읽고, 넌 무엇을 기대하나

존윌리엄스의 스토너, 박준의 메밀국수

스토너, 그는 정말 철저하게 ‘삶을 관조하는 자’(옮긴이)였다. 작가 인터뷰를 인용해 ‘그가 진짜 영웅이고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도 했으니까’라고 하며 ‘사는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누구나 스토너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사건이나 갈등이 앞서지 않는 조용한 일대기적 소설이지만 문장에서 느끼는 감동이 커서 왜 그렇게들 인생 소설로 꼽는지 알 것 같았다. 소심하고 때로 비겁하고 약점 많은 스토너이지만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소신에 찬 교수직을 수행하였고 자신의 결대로 흐르며 살다가 갑자기 찾아온 임종 장면에서는 자신이 쓴 유일한 책을 쓰다듬으며 짜릿한 설렘 속에서 죽음을 완성한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 녹초가 될 때까지 즐겁게 온몸을 바쳐 일하면서 이 시절이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이렇게 온전한 순수성과 성실성으로 스토너는 자신을 한결같이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산책하며 오디오북으로 다시 들어보니 딸 그레이스에게 했던 스토너의 아내 이디스의 가학적인 행동의 뿌리가 이해되기도 했다. 그녀는 관조를 넘어 회피 전략으로 일관한 스토너에 대한 원망으로 아빠와 딸의 사이를 갈라놓고, 딸에 대한 과한 억압을 한 결과 그레이스는 감옥 같은 집을 벗어나기 위해 자기를 망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엄마 이디스가 억압적인 집안 분위기를 탈피하고 싶어 빠르게 결혼 한 것과 유사한 선택으로 볼 수도 있다. 아빠 역시 딸에 대한 역할을 최소화하며 회피로 일관하여 가까운 사람들과의 갈등에서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인다.   

 

 마흔셋에 시작된 캐서린과의 사랑으로 인해 스토너에게는 생명력 넘치는 많은 변화가 찾아온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이고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리하여 ‘열정에서 시작된 감정이 욕망을 거쳐 깊은 관능으로 자라나 순간마다 계속 새로워’지는 사랑을 느끼며 바야흐로 인생이 꽃피는 반전을 꾀할 줄 알았으나 역시 스토너답게 일과 자신이 망가지지 않는 선택을 함으로써 캐서린을 떠나 보내고 만다.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이런 선조들의 공통의 기준과 농사일을 대하는 부모에게 받은 영향이 스토너의 뼛속 깊이 내재화되어, 고전문학을 읽고 가르치는 넘치는 지식으로도 그의 성품과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여겨진다. 

 문득 내 안에서 부모의 복사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날 때면 흠칫 놀라 누군가 눈치를 챘는지 눈치를 보며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곤 한다. 배운 것 읽은 것 따위로 나를 바꾸기는 힘들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이 소설은 대목마다 얘기할 거리가 많아 독서토론 도서로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경험과 엮어 말할 거리가 많은 데다 문장이 좋아서 혼자서도 되새길 부분이 많다.     

 ‘영문학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강의실에서 전달하는 내용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그때는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면 그 틈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가장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감정들이 강의에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생기가 넘치던 것들이 그가 하는 말 속에서 시들어버렸고, 그에게 가장 감동을 주었던 것들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런 말들은 한 두 단어만 바꾸면 다 내 얘기로 와 닿는다. 준비할 때의 내 느낌이나 기대와 현장에서 전해지는 내용의 틈이 너무 커서 허우적거리던 생각이 난다. 참신한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많이 할수록 그 간극이 커서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인 양 쓰윽 축소한 것들이 어디 한두 개일까, 세월이나 경험이 무능감과 무지를 덮어주리라는 기대를 고스란히 안고 퇴직을 했으니 얼룩진 자괴감의 장면들이 저절로 소환되어 괴롭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가 죽음을 앞두고 이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 한다. 무엇을 기대하고 사는지, 그 기대를 위해 내가 견지하는 자세나 방향은 무엇인지, 얼마나 순정을 가지고 성실하게 임하는지, 자꾸 물어 댄다. 하이고 참말로 나는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어떻게 사나, 아직도 오리무중 속을 헤매는 중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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