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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울 Jun 22. 2024

미친 자들의 이야기

포필리아의 연인, 로버트 브라우닝


포필리아의 연인

                                                   로버트 브라우닝     


오늘 밤 일찍부터 비가 내려요

화난 바람이 금방 깨어났어요

화가 나서 느릅나무의 꼭대기를 찢어발겨요

바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나쁜 짓을 해요, 호수에 파도를 일으킬 정도로요

내가 바람소리를 깨질 것 같은 아픈 마음으로 듣고 있어요   

  

그때 포필리아가 슬그머니 들어왔어요

바로 문을 탁 닫아서 추위와 폭풍을 막았어요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아무것도 없던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작고 초라한 오두막 집안을 따뜻하게 만들었어요

그것을 하고 난 다음에 몸을 일으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외투와 숄을 벗었어요

그리고 더러워진 장갑을 벗었고

모자를 푸니 축축해진 머리가 떨어져 내렸어요

마지막으로 내 옆에 앉았어요     


그리고 내 이름을 불렀어요 하지만 나는 대답을 안했어요

그녀는 내 팔을 잡아다가 자기 허리에 둘렀어요

그녀의 부드럽고 하얀 어깨를 드러내놓고

그녀의 노란 머리를 내려뜨린 채 흔들었어요

그리고 몸을 굽혀서 내 뺨이 자기 머리채에 닿게 했어요

내 얼굴 전체에 그녀의 금발이 감싸졌어요     

낮은 목소리로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그런데 그녀는 마음의 움직임과는 달리 자기가 너무 약해서

마음의 끓어오르는 열정을 자존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못한다는 것

더 허영심에 넘친 끈들을 끊을 수가 없다는 것

그래서 너에게 나를 영원히 온전히 줄 수가 없어

하지만 때로는 열정이 허영심을 이길 때가 있어

오늘 밤에 있었던 멋진 연회도 막지 못했어

나에 대한 사랑으로 창백해져 가는 너에 대한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어

아무리 안 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더라

그래서 폭풍과 바람을 뚫고 온 거야     


내가 이제 기분 좋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어

마침내 나는 알았어

포필리아가 나를 숭배한다는 것을

깜짝 놀라서 내 가슴이 점점 더 부풀어 올랐어

이 순간 내가 무엇을 할까 갈등했지

이 순간 만큼은 그녀는 나의 것, 아름답고

완벽하게 순수하고 착한 존재로서, 나는 알았어

마침내 무엇을 할 지를, 그녀의 머리를

하나의 긴 노란색 끈으로 만들어서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세 번을 감았어

그리고 목을 졸라 죽였어 전혀 고통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어

     

정말 확신해요 그녀는 아무런 고통도 없었어요

마치 닫혀 있는 꽃봉오리 안에 벌이 담겨 있는 것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꺼풀을 열었어 다시 한번

티끌 하나 없는 맑은 파란 눈이 웃고 있었어

그 다음에 목을 감았던 머리채를 풀었어

그리고 뜨겁게 키스를 했더니

그녀의 볼이 홍조를 띠더라     

그녀의 머리를 아까처럼 바로 세워서

단지 이번에는 내 어깨에

그녀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지


미소 짓고 있는 장밋빛 작은 머리

그 얼굴이 기뻐하는 것처럼 보여

그 머리가 경멸하던 모든 것이 이제 다 사라져     

그리고 그녀의 사랑의 대상인, 그 모든 것을 대체한 나를 얻었지

그녀의 가장 소중하던 하나의 소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추측 못하겠지

자, 우리가 이렇게 지금 같이 앉아 있고

밤새도록 꼼짝도 하지 않았지

하지만 신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박선주 교수의 영시 강의는 더욱 평면적으로 외국시를 읽는 습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각으로 입체적 분석을 하는 통찰을 주어 놀라웠다. 그의 강의 내용을 우선 정리하였음을 밝힌다. 


 그에 따르면 외부 세계는 내면 세계의 반영으로 보아 1연의 험한 날씨 상황은 남자의 엄청난 화를 표현한다. 

 포필리아는 엄청 긴 금발, 푸른 눈, 하얗고 아름다운 어깨, 장밋빛 홍조를 띤 얼굴색을 지닌 여인이다. 스케이트를 타듯이 미끄럽게 내 집으로 들어오고 오자마자 불을 피우는 것으로 보아 한두 번 온 게 아닌 상당히 친밀하고 익숙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인이 와서 남자 이름을 불렀을 때 대답을 안 한 것은 삐졌다는 표현이고 그러자 여자가 온갖 교태를 부리며 머리로 애무를 한다. 그녀는 돈 많은 남자를 둔 유부녀일 수도 있고, 어쨌든 특별한 연회라 추측되는 엄청 화려한 연회에 간 동안, 남자는 초라한 오두막에 버려졌다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보통은 여성이 처지는 입장이지만, 남자가 처지는 경우의 수모감 모멸감 좌절감이 여성에 비할 바 아니고 이 남자가 느끼는 극도의 분노도 그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 연회에서 ‘더러워진’ 포필리아가 나를 숭배한다는 것을 안 순간 남자는 그녀가 내 것이라 느끼고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함과 ‘pure’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며 그 순간만큼은 순수하다고 느낀다.      

 

 키 큰 어른이 작은 아이에 맞추기 위해 낮춰 숙이는 ‘stooping’을 여자가 남자를 만나기 위해 stoop하는 자세에서 이들의 위계가 드러난다. 자신을 애무했던 그 긴 머리로 목을 졸라 죽여서는 여자가 자기에게 기대게끔, 여자가 자기 어깨에 기대 축 늘어져 의지하게끔 만드는 장면에서, 여자의 stooping이 얼마나 사무치게 자존심 상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인지를 드러낸다.     

  

 남자의 광기는 죽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눈을 까뒤집어 보고 시체의 파란 눈이 웃고 있다고 상상한다. 죽은 사람에게 키스를 하자 홍조를 띤다고, 시체를 보면서 이 여자도 지금 행복하다고, 그녀가 원한 것은 바로 이거였다고, 그녀가 경멸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얻게 돼서 얼마나 좋으냐며 완전히 미친 광인이 되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이 광인 화자가 묘사하는 여인은 요염하고 관능적인 섹슈얼리티의 액티브한 여성으로, 어깨를 스스로 내리고 머리로 애무하는 프로페셔널한 고도의 유혹기술을 구사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그래서 남자가 ‘이 여자는 죽여도 돼, 이렇게 성적으로 자유롭고 거침없고 나를 누르고 내 위에서 군림하고, 그러니 나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지 않아? 이래서 죽인 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시다.


 그러나 이 여성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여자가 싫어하는 남자 집에 오지는 않을 것이지만 남자가 하는 행위를 보면 그의 말에 설득되지도 않고 그 말을 다 믿을 수도 없다.     

 

 이 시의 배경은 19세기 초반이고, 브라우닝은 19세기 후반 사람이다. 19세기 초반은 블레이크 등 낭만주의 서정시의 시대이다. 19세기 빅토리아시대의 사랑은 크게 다를까 싶지만 남녀간의 위계가 사회적으로 다른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순간을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순간을 박제하고 싶은 욕망으로만 죽였을까?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을 잡아 지속시키는 방법은 없다.      

 

 화자인 나는 권위를 가지고 말하지만 광인의 버전이므로 진실인지 의심해봐야 한다. 포필리아가 왜 왔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어떤 저항도 없었는지, 아무 고통도 안 느꼈다고 두 번이나 확신한다고 말하지만 진실은 정말 모른다는 것,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광인 러버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감했다면 그 사람도 어느 정도 광기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의 말은 아주 협소하고 주관적이고 믿을만하지 못한 견해에서 왜곡되고 비틀린 말이다. 그는 미쳤기 때문에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도 우리 입장에서 얘기하고 자기의 욕망과 열등감과 모멸감, 분노에서 사건을 본다. 아무리 권위적인 '내'가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 우리는 절대로 포필리아의 진실에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에드몽 웰즈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열 가지의 가능성이 나온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

내가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

내가 말하는 것,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것,

당신이 듣고 있다고 믿는 것,

당신이 듣는 것,

당신이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것,

당신이 이해하는 것”     


 이 열 가지 사이에서 온전히 의사 소통을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어디 열 가지 뿐일까, 같은 장면을 본 사람들의 진술이 하나같이 다른 것을 보여주는 영화는 또 얼마나 많은가.

 자기의 욕망과 열등감과 모멸감, 분노 안에서 잘못 건드려지면 왜곡되고 비틀린 말들이 광기를 뿜으며 얼마나 논리정연하게 살기등등하고 분기탱천하게 서로를 잡는가.     

 

 브라우닝의 이 시는 진실은 부분적인 것이고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는 어느 부분에서 모두 다 조금씩 미친 사람들이다. 자기의 욕망과 열등감과 모멸감, 분노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사건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나와 상대를 미친 자들의 명단에 넣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대화가 겨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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