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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Braun Jan 14. 2024

시간 돌봄

덕수궁 & 장욱진 회고전 (24.01.14)

 고인 물은 썩는다. 고여서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애주가의 머릿속에 문득 와인이 떠오른다. 빈티지 와인이라는 게 있지. 오래돼서 더 값어치가 생기는 것도 분명히 있다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와인이 딱 그렇네 하면서 웃음 짓다가도 100년 넘은 와인이 맛있었다는 이야기는 어쩐지 들어본 적이 없다. 100년 까지는 어떻게 살아남는다고 해도 1,000년은 무리겠지. 결국 고여서 썩지 않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좋은 와인은 대를 이어 시행착오를 거친 훌륭한 와인생산자들이 만들어낸다. 그들의 경험과 노하우에 힘입어 금이야 옥이야 키워진 와인이 되어야만 비로소 빈티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인생은 한 번뿐이다. 결국 빈티지 와인처럼 되기에 보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싶다.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와인만큼 적절한 소재가 없다. 좋은 와인이라는 것은 뭘까? 빈티지 와인은 와인에 문외한 이들이 마시기에는 간장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꼭 간장은 아니더라도 한 순간에 좋은 와인이라고 알아차리긴 어렵다. 결국 취향의 문제로 귀결되는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라는 판단 뒤에는 보편적인 가치도 있다. 와인에는 '과실향'이라는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 과일향이 가장 흘러넘치는 순간을 정의 하는 것은 수확한 시점이다. 사실이 이렇기 때문에 와인 전문가들은 우리에게 잘 만든 어린 와인을 추천한다. 그런데 가치 있는 빈티지 와인은 하나 같이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과실향'을 잃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나는 마셔본 적이 없기 때문에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을 거쳐서도 '과실향'을 지니는 것은 호기심을 소중하게 간직한 현명한 어른과 같다.


 내가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다. 썩은 냄새를 숙성의 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지키려고 하는 가치가 완강해 보여도 세상의 이치와 결이 같다는 개똥철학을 내세울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정말이지 내가 썩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썩기는 싫다. 그래서 하나의 척도를 찾고 싶었고 그 척도로서 시간을 차용해 보고자 한다.

 결국 고이는 세월은 시간의 흐름이기 때문에 그 시간 자체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그 시간을 판단하기에는 너무 많은 외부의 것들이 작용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의 결과물은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용하는 너무 많은 맥락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원래 '나'라는 사람의 가치, 외부의 사건, 우연 등등이 합치면 온전한 세월의 가치를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시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게 어떨까?

 결론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인지 상태를 지표로 하여 내가 썩어가고 있다고 표현하고자 한다.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나에게는 이 지표를 적용하고 싶다. 적게는 하루 길게는 1년 동안 나의 시간이 아무 생각이 없이 지나갔다고 하면 꽤 썩어가고 있는 증거다. 육아는 힘들고 일은 바쁘지만 시간 자체의 무게는 내가 조절할 수 있다. 그 무게를 조절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극이 필요하다. 특히 다른 사람의 생생한 시간이 투자된 결과물을 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이번주부터는 일요일 아침을 이용해서 의미 있는 전시를 찾아다니려고 한다.


 일요일 아침 정동길은 정말로 고고했다. 조용하고 청명하니 머리까지 맑아지는 기분이다. 덕수궁 안에 그렇게 다양한 양식의 건물이 있는지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번 방문을 통해 느낀 것을 글로 적으려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그래도 한 줄로 정리해 보자면, '시간과 위엄 그리고 노력이 쌓인 문화재를 보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깨를 추스르고 똑바로 행동해야 할 것 같다.' 재택근무를 하다 보면 혼자 일하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사실은 더 많은 사람의 염원과 시간이 그 일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진다. 결국 나 자신의 직업관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내 일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가?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장욱진 회고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생면부지 처음 들어보는 화가의 회고전이다. 그런데 한국 미술사에 상당히 중요한 분이셨던 것 같다. 작품도 많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화가의 굵은 가치관의 선이 느껴진다. 세속적인 나에게는 미술품의 관리 출처가 눈에 띈다. 이건희 컬렌션으로부터 왔다는 설명이 꽤 많다. 처음에는 재밌다고 느껴졌지만, 이내 곧 이런 작품을 모아서 가치를 확인하고 보관할 수 있었던 시간의 향유가 부러워졌다. 전시 중간중간에 장욱진 님의 글귀도 많았다. 하나하나 모두 마음에 박히는 글귀다. 그중에 하나만 발췌하면서 오늘의 글은 힘을 빼고 다음을 준비해야겠다.


"나와 아내가 성실하고, 올바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한은 아이들은 거침없이 씩씩할 수만 있으면 된다. 함께 생활하는 동안 아이들은 부모를 닮고, 은연중에 뿌리 깊은 성격구조를 형성한다. 그들을 위하여서라도 나는 단순한 아버지이기 이전에,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장욱진, 월간세계, 16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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