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 & K1 K2 K3 HANOK(24.04.14)
언젠가 유재석 님이 운영하는 TV 프로그램에서 '죽음'을 주제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정확히 주제는 '죽음'을 생각할 때 각각 어떤 느낌인지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와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라는 의견이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후자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어딘가 '죽음'을 생각하면 너무 막막했다. 죽음 자체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죽음 이후의 세계의 막막함을 어쩔지 몰라서 온몸을 비틀다 보면 심장이 철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다가 이내 잠잠해지곤 했다. 사춘기 한 시절의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꽤 오랫동안 같은 생각을 했고 그때마다 어쩔 줄 몰랐다. 다만 그 TV 프로그램의 장면을 시청할 즈음에는 내가 더 이상 죽음에 대해 가슴 철렁이는 감정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슬러 올라가 보니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부터인 것 같다. 정확히 어떤 기재에 의해 두려움이 잠잠해졌는지 모르겠지만 분석해 보면 죽음의 미스터리와 가까운 탄생의 미스터리가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이유 아닐까? 혹은 나의 세계보다는 내가 지켜야 할 세계가 생겨서 내 세계의 중요도가 떨어져 버렸는지 모르겠다. 이유불문하고 분명히 나의 죽음에 대한 감정은 비교적 고요하다. 대신 나의 죽음이 나의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불안감이 새로 생겼다. 그래서 묘하게 가족을 두고 혼자 다니는 출장과 같은 순간에는 꽤 예민한 상태가 되어서 잠을 못 자는 편이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서 '사후 세계(世界)'를 생각하다 보면 세트처럼 붙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바로 무신론자의 죽임과 광신도의 죽임의 비교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그 시기즈음에 떠오른 생각이다. 즉, 아무것도 믿지 않은 무신론자의 죽음보다는 사후 세계를 그 누구보다 믿는 광신도의 죽음이 더 행복할 것이라는 나의 가설이다. 지금도 내 생각은 유효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신론자에게 사후라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는 이해하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무신론자는 신만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후 세계도 부정하는 나 같은 부류다. 뻔히 나만의 답을 알면서도 기분 좋게 광신도가 되지 못하는 것은 '이해'라는 것의 본질의 한계 때문이다. 광신도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빨리 합리성을 추구해 버렸다.
세대의 경계 혹은 세상의 경계가 되는 세계 (世界)는 그 무엇보다 자의적이다. 같은 사물과 공간도 모든 사람의 인식이 다른 이유는 아마도 각각의 세계를 각각이 그렸기 때문일 것 같다. 인간은 철저하게 독립적이지만 결국 그 세계에 홀로 있는 것이 외롭기 때문에 타인의 세계를 정복하거나, 휴전하거나, 상생하려고 한다. 결혼도 어쩌면 두 세계가 만나는 점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이 만나서 상생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언어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면서 서로의 언어에 대한 감각이 높아진다. 물론 아이뿐만 아니다. 이런저런 모습으로 세월을 함께하면서 서로의 언어가 발전하고 확장된다. 그리고 그 암묵적인 언어는 중요하다. 이런 점에 있어서 처음부터 언어가 달랐다고 하는 사유로 싸우기 시작하면 십중팔구 헤어지게 된다. 가끔 지인들의 부부 상담을 듣다 보면 '아, 이건 위험한데'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일반적으로 언어 불일치에 해당하는 사유일 때다. 물론 그냥 모른 척 지나간다.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그 세계에 초대될 수 있다. 정말이지 피곤한 일이 될 거다.)
국제 갤러리는 내 삼청동 인생에서 최소 100번은 지나쳤을 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 세계는 내 이해의 지도안에 없었다. 그래서 삼청동을 실제 행정동 단위로 구분할 만큼 전문가를 자처하는 나지만 국제갤러리만큼은 마치 블랙아웃되어 있는 지워진 장소였다. 미술관이라는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시작하고 그 길에 먼저가 있는 사람들이 보내는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이해하는 만큼의 세계라는 말이 마음속에 박힌다. 정말 이곳이 맞아?라는 생각을 하며 멍한 상태에서 전시회를 관람했다.
작가가 누군지도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도 모두 확인했지만 오늘 내가 본 실제 관람은 국제 갤러리 K1, K2, K3 그리고 KUKJE HANOK이다. 각각의 코드는 국제 갤러리의 전시관의 이름이다. 겉에서 수십 번 지나쳤던 국제 갤러리 K1은 시작에 불과했고 그 뒤 공간이 열리면서 KUKJE HANOK 그리고 그 뒤로 연결되는 K2, K3 등의 공간을 목격하고 정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처음 듣는 'KUKJE'라는 이질적인 이름의 미술관이 하나의 거대한 세계로서 내가 사랑하는 공간에 오래된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다가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다. 나의 삼청동 앓이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에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K3 건물에 감탄하고 뒷문으로 나온 순간 묘하게 익숙한 골목이 나온다. 대학교 때 수십 번은 지나친 골목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좋아하는 블루보틀 건물이 나를 비웃는 것처럼 말짱히 서있었다. 세계를 확장하고 보니 원래 알고 있는 세계와 연결하는 길이 보인다.
세계라는 말을 두고 현상을 이해하는 훈련을 오늘 하루 시도해 보니 재밌는 것들도 보인다. 새로운 직군으로의 커리어 변화를 시도했던 나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려고 시도를 했고 그것은 생각보다 너무 먼 두 세계의 만남이어서 어려웠다는 것. 지금 내가 누군가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상황이 있고 내 의견을 꼭 관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두 세계의 전쟁을 각오한 결심인가? 등이다. 이유 없이 미워했던 의견이나 나의 세계를 이해받지 못해서 화났던 감정들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
한편으로는 인생은 짧기 때문에 더 많은 세계를 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시작점은 비슷한 언어에서부터다. 경험상 아주 먼 세계의 언어를 단숨에 이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나와 결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세계는 세계 그 자체가 비슷한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dot)들과 소통하면 세계는 한 발짝 더 열리고 그 한 발짝 이후의 다른 발자국은 또 다른 점(dor)을 만나서 확장한다. 이렇게 조금씩 꾸준히 점들을 이어가다 보면 어느새 한바퀴 돌아서 익숙한 세계로 연결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