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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Braun Oct 06. 2024

솔직히 말하면

열정과 균형 사이의 세계

 '솔직히 말하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주는 묘한 불편함이 있다. 애초에 솔직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중요한 이야기를 하거나 지금까지의 상황을 반전시키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은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말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후렴구처럼 던지고 하고 싶은 말을 꺼낸다. 여기에 본능적으로 2가지 불편함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일관성의 문제다. '지금까지 3시간을 족히 떠들었는데 이제야 솔직한 이야기라고?' 애초에 솔직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거야? 꼭 이 후렴구 같은 문장이 있어야만 솔직한 것일까? 두 번째는 내용의 공허함이다. 막상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전까지 했던 3시간의 뉘앙스를 합쳐놓은 요약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3시간 동안 묘한 뒤틀림으로 본인의 생각을 여러 가지 비언어적 방법으로 표출한 뒤에 비로소 문장으로 해결했다는 마무리에 가깝다. 물론 이것보다 더한 경우 '솔직히 말하면' 뒤에 초점 잃은 단어가 등장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허탈함까지 느낀다. 그 외에도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딱 한 글자 다르지만 쓸데없이 거만해 보이는 표현도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솔직히 말하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글의 주제는 자기 안에서 찾는다고 했던가? 내가 가장 불편해하는 문장 '솔직히 말하면'에 대해서는 애증이 느껴진다. 하루 24시간을 두고 절대 이 문장을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난이도는 극악에 가까웠다. 물론 아무도 만나지 않는 시간에는 비교적 쉬운 과제에 속한다. 다만 본격적으로 열정을 가지고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설득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면 필수불가결하게 해당 문장이 먼저 입에서 튀어나온다. 뇌보다 입이 빠른 게 틀림없다. 이전에 TV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다. 자주 쓰는 단어를 말하면 널빤지 같은 스프링을 통해 앉아있던 의자가 튀어올라 수영장으로 날아가는 방송이었다. 프로그램의 PD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아닐까?
 '사람은 절대 본인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건 아마도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의 영역일 것이다.'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글로 나열하라는 과제가 있다면 아마도 장원급 문장을 써 내려갈 수 있다. 다만 어제부터 애처롭게 보였다. 아마도 이 어구가 단순히 '언어적' 습관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개인이 가지는 열정과 지켜야 하는 균형 안에 숨겨져 있는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을 말하기 위한 전제는 우리가 행동하거나 말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솔직하지 않을 수 있다'라는 것을 전제한다. 과연 그렇다. 솔직함이라는 게 무엇일까? 솔직함은 사실과 다르다. 사실은 실제 있었던 일이지만 솔직함은 내 안의 작은 세계 속에서의 사실이다. 즉, 솔직함과 사실은 N:1의 관계이다. 여러 가지 솔직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지만 사실은 하나이다. 이 사실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솔직함은 다양성을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갈등을 유발한다. 정말 솔직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시한폭탄 같은 존재일지 모르겠다. '네가 하는 이야기는 단 1분도 더 듣고 싶지 않아.'라는 솔직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외에도 아주 다양한 버전의 솔직함이 존재한다. 이건 개개인의 작은 세계에 묻고 싶다. (어떤 지옥이 펼쳐질까)



 이런 맥락에서 '솔직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전략적 무기로 쓰인다. 지금까지는 잘 참아왔지만 이번만큼은 내 안의 세계를 세상에 펼쳐놔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는 언어적 선택이다. 이를테면 유명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영역 전개'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내 세계가 내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확장시키겠다는 경고이며 신호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억압이 빈번하거나 내 안에 열정이 많을수록 '솔직함'을 빈번하게 이야기하게 된다. 다만, 언어는 습관의 영역이다. 그러다 보니 너무 잦은 '영역 전개'는 외부 세계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 다들 내 안의 세계를 떠벌리고 싶어 하지만 결국 잦은 습관이 돼버린 솔직함은 공허한 울림으로 남는다. 

 한편 자신의 세계가 단단한 사람들은 솔직함을 언어화하지 않는 것 같다. 단지 행동으로 여과된 내 안의 세계를 투영한다. 중요한 것은 '여과된 세계'다. 이들의 솔직함은 날 것 그대로 있지 않다. 날 것에서 열정만 뽑아내고 그 생각을 다듬어 낸다. 그리고 날 것 그대로 이거나 어딘가 문제가 있고 불필요해 보이는 것들은 모르는 것들을 한 구석에 모아둔다. 절대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잘 모아두고 관리해야 한다. 이것이 균형의 세계다.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내 안의 세계를 '여과'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따분한 작업이다. 애석하게도 열정과 균형은 서로 상반된 모습을 갖는다. 열정은 날 것에서부터 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핵심 근처로 불순물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형태로 보아서 불순물이라는 것이지 사실 본질적으로는 씨앗에 가깝다. 학창 시절 기타를 배우고 싶은 열정의 불순물은 '관심'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성의 관심이었다. 주목받지 못하는 까까머리 중학생의 세계 안에서 힙한 뮤지션인 나 자신은 기타를 멋지고 연주하고 관심을 받는다. 그 학생의 열정은 씨앗은 이성의 관심에서 시작되었지만 중년에 가까워진 나에게는 가끔 세상을 환기할 수 있는 취미가 되었다. 그 열정은 음악 자체가 되고 삶을 다채롭게 한다. 그렇다면 열정은 여과되었을까? 아마도 음악이라는 세계는 세월에 따라 여과된 것 같다. 그 불순물은 어딘가 내안의 한구석 서랍안에 담겨서 보관되어있겠지 싶다. 

 균형 잡힌 사람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멋있다. 여유가 느껴지고 포용력이 보인다. 다만 그 균형을 위해 쏟고 있는 에너지는 상상 이상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 탁월한 모습을 보일 때 백조의 수영을 비교하곤 한다. 우아하기 위해서 물 밑에서 이루어지는 백조의 다리의 운동량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이야기다. 균형은 멋진 상태이지만 한편 가장 위험한 상태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여 내 안의 판도라의 서랍이 문이 미세하게 열리기라도 한다면 그 많은 날 것의 열정이 쏟아져 나올 것을 직감으로 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신경써야한다.

 기본적을 균형적으로 산다는 것의 문제는 따분하다는 점과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감각에서 멀어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적절히 열정을 끌어다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세상의 문제는 다 비슷한 해법을 가지고 있어'라는 방식의 사고가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되고 이것은 늙은 생각의 최초의 모습이 된다. 결국 균형을 유지하면서 항상 새로운 것에 가슴 뛸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이게 참 어렵다. 



 열정이 고갈된 상태에서 '솔직한 말'을 찾고 있다. 계절의 영향인지 가사 들리는 노래를 찾아 듣기 시작했는데 단연 이적의 음반들이 보인다.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가 또 다른 방식으로 들리는 시기다.


https://youtu.be/zR-CMXw8-ts?si=y7RvyTUxi5bhjb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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