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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zy Cow Society Mar 10. 2024

자이언티를 사랑한 만큼 불행해진 이유

자이언티 ZIP

20대까지만해도 가장이랄지, 제일이랄지, 최상급 표현을 서슴없이 쓸 수 있었다. 당시엔 모든 부분에서 감정과잉상태였는데 지금도 그렇다는 걸 부인할 수 없지만 경험적으로 절대라는 선언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설사 내가 지금 가장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할지라도 이 마음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유통기한을 습관적으로 가늠해보곤 한다. 내가 영원히 사랑할 거라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좋아하는 건 싫어질 수 있지만, 싫어하는 건 절대 좋아질 수 없다고 자신했었다. 싫어하는 것이 줄어드는 만큼 좋아하는 것도 무뎌지는 것 같지 않냐는 말을 종종 하는 30대 중반에 이르면 좋아하는 뮤지션이 특히나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될 거라곤 10년 전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다.


물론 뉴이스트 출신 아이돌 백호(강동호)의 8년차 팬이고, 백호는 여전히 나의 최애이고, 뉴이스트 앨범의 프로듀싱과 작사, 작곡을 도맡았던 백호의 음악적 성장을 사랑했으나 그것이 내 취향의 전부를 대변하기엔 언제나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백호의 음악도 내가 좋아하는 어느 한 부분임은 분명하지만 너무나 내 이상형의 외모를 하고 있는 한 연예인을 사랑하며 뒤따라오는 것이라 나를 대표하는 설명이 되기엔 지엽적이었다. 하지만 백호만큼 열렬히 빠졌던 연예인은 내 인생에 없었다. 그래서 백호에 입덕한 일은 인생의 사건이었고, 그로부터 8년이 지났고, 그동안 나는 직장이 4번 바뀌었고, 이제는 아마도 백호가 마지막 사랑이겠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을 대답하기란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라 생각할 때 다시 한번 사건이 벌어졌다.


자이언티를 좋아한 적은 없었다. 단지 좋은 곡을 만드는 완성도 높은 뮤지션이라고 생각할 뿐, 싫어하진 않지만 좋아하는 일은 절대 없을 범주에 있었다. 내가 아는 건 양화대교와 씨스루를 불렀고, 무한도전에 나왔고, 로맨틱한 히트곡들을 꽤 냈던 가수 정도로 남들이 아는 정도보다도 아마 한참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자이언티의 노래를 내가 직접 플레이리스트에 담아서 한 곡을 다 들었던 적은 ‘눈’ 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작년 12월 앨범 ‘ZIP’이 최신음악에 뜬 날, 새벽 5시 40분부터 10분 간격으로 울리는 알람을 꺼가며 비몽사몽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출근 준비할 음악을 고르던 나는 갑자기 그 앨범의 전체 재생을 눌렀다. 첫 곡 ‘How To Use’엔 ‘아침에 일어나면 나가기 싫지. 그래서 만들었어 이 LP’라는 가사가 나온다. ‘물 첫 잔 마실 때, 예쁜 옷 고를 때 틀어놔’라고 말하는 사용설명서 덕분에 이 앨범을 잠에서 깰 때마다 의식처럼 틀어놓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빠져든 건 자이언티일까, 좋아했던 그 사람일까. 당시 나는 진작 정리했어야하는 사람과 인스타그램, 블로그, 카톡, 뉴스레터라는 수많은 경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23년 5월 이후로 만난 적 없는 사람의 일상을 파편적으로 접하며 커져가는 온갖 망상들, 주로 ‘만나는 여자가 생겼나’와 같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물음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반 년만에 모든 연결을 끊은 뒤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서 틈만 나면 더 맹렬하게 무언가를 보고, 그것도 지치면 유튜브 피드를 무한정 스크롤하던 시기에 자이언티가 5년만에 발매한 정규앨범 홍보를 위해 온갖 유튜브 채널에 등장했는데 내 알고리즘에도 하루에 2번 이상 보일정도였다. 그 중 가끔 보는 ‘조현아의 목요일 밤’을 눌러봤다. 빠더너스의 비디오 키즈 후드와 부시시한 탈색 머리, 선글라스가 아닌 눈이 보이는 안경을 쓰고 무해한 사람처럼 웃는 자이언티는 일단 내 기억의 날카로운 인상과는 달라져있었고 콘텐츠 특성상 당연히 조현아는 자이언티가 부를 노래의 반주를 쳐야만 했는데 ‘피아노 쳐줘서 고마워’ 라고 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나갈 법한 일에도 고맙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만드는 음악은 무엇일지, 처음으로 자이언티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그 날부터 자이언티가 등장한 모든 유튜브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으므로 일단 이번 앨범 공식 영상을 찾아봤는데 뮤직비디오의 완성도에 먼저 놀랐다. 영화 애호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하자면 영화적이었다. 하나의 곡마다 사람과 관계에 대한 오랜 관찰을 문장으로 정리한 고유의 서사가 담겨 있는데, 그 서사는 노래가 들려주지 않았지만 존재하는, 감독 혹은 작가가 기획해놓은 영화 캐릭터의 전사처럼 뮤직비디오로 확장된다. 음악, 연기, 각본, 연출, 촬영, 편집, 사운드, 미술, 의상 등 어떤 부분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집요하게 완성도를 높이는 종합예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이언티는 감독같기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작가같기도, 그 모두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은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한편 ‘솔의 눈’이라는 이제는 운영하지 않는, 자이언티가 신인가수 솔의 눈을 연기하는 기믹 유튜브 채널을 뒤늦게 정주행하며 놀란 점은 자이언티는 디지몬 캐릭터인 파닥몬의 진화가 얼마나 부조리한지 열변을 토하거나 펭수와 ‘눈’을 부르기 위해 EBS를, 번개맨 차림으로 아침마당과 한문철tv에 출연하는 기행을 즐거워하는 꽤 똘끼 있는, 하지만 사회적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여러 협업과 새로운 시도에 열려있고 좋은 팀워크를 만들 줄 아는 프로페셔널한 아티스트는 내가 빠져들만한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일을 통한 비전이 있어야 하며, 심지어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가졌다면 더할 나위 없다. 게다가 영화를 비롯 좋은 취향을 가진 예술가적 기질에 여지없이 사랑에 빠지곤 했는데, 문제는 이러한 성향의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가장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연애관계에서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자이언티의 ‘나쁜놈들’에서 ‘근데 너보다는 내가 더 중요하지 / 누구에게나 골이 있어 / 난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너에게는 / 웃어보이지 나 좋을 때는 / 항상 외로워 부르르 떨거든’이라는 가사를 들으며 내가 지금까지 사랑해서 불행해진 사람들과 자이언티를 같은 이유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뒤늦게 인스타그램, 블로그, 카톡, 뉴스레터의 연결을 끊은 그 사람은 작가였다. 예쁜 옷과 안경을 좋아하고 그는 주기적으로 호텔 라이즈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와 연애할 수 없는 아주 희소한 이유가 있었고, 하지만 미묘한 관계를 이어 갔기 때문에 때론 애인 같았지만 선 하나를 넘지 못하는 잡히지 않는 사람이었고,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있었고, 나는 그 구멍을 채우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자이언티는 쇼미더머니10을 찍는 동안 동료들과 호텔 라이즈에 작업실을 만들었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안경과 심지어는 그가 주문제작한 디자인과 거의 흡사한 반지를 착용하곤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는 다정함이나 조곤조곤한 말투, 마른 체형까지 비슷했다. 매력적인 한 아티스트에게 맹렬하게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이 감정이 누구를 향하는지 헷갈렸지만 사랑을 쏟을 대상이 사라져버린 나에겐 마침 좋은 대체였기에 좋아했던 사람을 투영하고 있었다. 자이언티의 모든 노래를 들으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번 앨범 ‘ZIP’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서 ‘비오는 날에 아스팔트 냄새 / 우산 아래 맞닿은 어깨’를 들을 땐 처음 길에서 손을 잡아본 기억을, 시부야케이를 떠올리며 만들었다는 ‘V’를 들을 땐 일본문화가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하던 그의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써있는 소개글 v를 떠올렸고, ‘불 꺼진 방 안에서’를 들을 땐 어느 내세나 다중우주에서의 우리를 상상했고, 이번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 ‘해피엔딩’에서 ‘문장과 문장 사이의 거리 /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거리지만 / 나는 여기까지 오는데 몇 달이나 걸렸지’를 들을 땐 노트북 앞에서 턱을 괴고 문장을 고민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는 각본을 쓸 수도, 연출을 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일찍이 알았기에 대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영화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직장인으로 살아왔다. 마케팅은 의외로 내 성향과 잘 맞아서 좋아하는 일과 잘 할 수 있는 일의 조건을 두루 갖춘 일이었다. 그럼에도 크리에이터가 되지 못한 결핍은 주기적으로 발작처럼 찾아왔다. 그래서 무용수, 뮤지션, 작가, 배우 등 한 순간에 몰입해서 다른 자아를 갖는 예술인들을 늘 동경했다. 나를 지우는 순간의 희열이 궁금했다. 작년 바운디와 아이묭의 콘서트 라이브 영상을 보며 후드에 추리닝같은 옷을 입고도 자신이 가진 재능 하나로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 참 부러웠다. 현재가 맘에 들지 않아서 나를 지울 수 있는 순간을 열망하게 된걸까? 실 없는 농담을 즐기던 자이언티가 무대 위에서 음악 안에 완전히 빠져들어 공연을 하는 모습이 또 다시 결핍을 자극했다. 그의 재능에 미친듯이 질투가 났다.


자이언티는 훌륭한 아티스트이면서 좋은 동료를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기획자같다.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만 있었다면 레이블 ‘스탠다드 프렌즈’를 설립하진 않았을 것이다. 21년 초, 오래 다니던 직장과 영화업을 떠난 후 좋은 팀을 이루는 데에 번번히 실패한 나는 작년 한 해 내내 남들이 가졌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뭘까 생각했다. 늘 각자가 가진 장점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며 최상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시너지를 내는 협업을 갈망했왔다. 특히 프리랜서 겸 개인 브랜드인 ‘레이지 카우 소사이어티’를 기획하고 실패한 경험은 스스로의 역량을 지나치게 의심하고 검열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뉴스레터 글쓰기 역량에의 회의감까지 심화되어 우리나라 최고의 뮤지션과 나를 비교하고 좌절하는 건 지나친 자의식이라고 생각은 한다만, 논리적 사고가 이미 가능했다면 이런 슬픔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라 자이언티가 될 수 없는 나, 혹은 자이언티같은 사람을 사랑했고 그 사람을 가지지 못한 나의 문제의 원인을 찾는 데에 천착하고 있었다. 이것이 영원한 나의 문제였다. 결핍은 내가 갖지 못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를 사랑하게 만들었고, 대상을 지나치게 신성화하는데다가 애초에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사람은 나를 채워줄 수 없어서 결핍의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사람과 자이언티는 너무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직장동료가 나에게 호감이 있는지 궁금하다는 팬의 사연에 “그냥 말 걸었는데 나 좋아하나? 이러지 마세요”라고 하거나, 잘생겼다는 팬에게 “이건 저희 엄마도 저한테 해주지 않는 얘기예요.”라고 답하는 자이언티의 T모먼트를 좋아한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을 묻는다면 의심하지 않고 자이언티를 답할 것이다. 그의 모든 노래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노래 중 일부를 매일같이 들었다. 이번 앨범을 제외하고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영화관’이다. 나의 모든 인생은 아니지만 인생의 일부를 영화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를 영화에 비유한 이 곡에서 ‘어떤 장면으로 남을까 / 너와 나의 이야기가 언젠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까 / 다음 주연 배우는 누굴까 / 난 어쩌면 카메오 아닐까 / 자리에 앉아있을까’라는 부분을 좋아한다. 자이언티 같은 사람도 카메오 혹은 카메오조차 되지 못하고 관객으로 남아있을 거란 생각을 하는 걸까? 내가 영원히 갖지 못할 사람이 투영된 (신성화 된) 자이언티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감정처럼 느껴졌지만 그래서 위안이 됐다.


한 아티스트를 마음에 들이는 과정에서 약 두 달간 예상치 못한 감정적 소용돌이에 휘말릴 줄은 몰랐다. 그런 점에서 자이언티는 내가 언젠가 ‘unlove’를 누른다 할지라 내 인생을 관통하여 한 시기를 기억할 키워드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이 감정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김종관 감독이 오래 전 “내 버려진 시간들이 다시 한번 기회를 선물로 받는다”며 영화 만들기 잘했다고 트위터를 남겼었다. 이 말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를 버티게 한다. 자이언티를 좋아하는 이유를 핑계삼아 결국 아직도 종종 떠올리는 사람에 대해 글을 쓰고 말았다. <이터널 선샤인>처럼 지우고 싶은 시기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 글 한 편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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