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전역을 맞이하며]
D-20
당초 예상보다 10일 정도 늦게 글을 쓴다. 전역을 20일 남겨두고 있는 주말 오전, 한적한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서 그간 연재했던 에피소드를 둘러보며 짧게 추억들을 스치듯 회상해봤다. 전역까지는 20일, 휴가출발 전 실제 근무일수는 7일을 앞두고 있는 지금 굉장히 오묘한 감정들이 뒤섞인 상태에서 글을 써보려고 한다. 그간의 공백과, 최근의 근황, 앞으로의 계획을 나누어서 작성해보고자 한다.
# D-82 ~ D-30
먼저 글을 쓰지 않았던 그간의 공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P.10>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시기에는 나의 전역 후 다음 여정을 위해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물론 군 복무와 대학원 수업을 병행하는 현생과 함께 에너지를 투입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서 사실 지치기도 했다.
다행히 글을 쓰는 이 시점에 내가 계획하고 준비한 작은 성취를 이뤄내어 기분이 좋다. 지난 화에서 밝힌 나의 ‘새로운 계획’처럼 언론ㆍ출판 분야에서 종사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지역 신문사 취재기자가 되기 위해 자격증 취득과 시험과 면접 준비, 자기소개서 작성 등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때로는 서류전형에서 떨어지기도 했고, 2차 시험에서 떨어지기도 했지만, 한 지역신문매체에 최종 합격을 하여 전역 후 취재기자로서 바로 일하게 되었다.
[알짱알장, ROTC 장교의 삶] 연재를 마무리하는 에필로그에서, 다음의 여정을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기회가 된다면 취재기자로서의 삶도 연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D-30 ~ D-20
감정의 변화가 가장 심한 시점이었던 것 같다. 5.30. ~ 6.1.일까지 대대 동원훈련을 마치면서 사실상 내가 현역으로 복무하며 했던 훈련은 종지부를 찍었다. 훈련을 마치고 보니 전역의 달이 밝았다. 특히, 5.29일은 석가탄신일 대체공휴일이었는데, 다음날 훈련을 준비하며 일찍 취침을 하려던 찰나에 신문사 면접을 다음날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대대장님께서 배려해주셔서 훈련을 하다가 군복을 입은 채로 잠시 신문사에 가서 면접을 보고 오게 되었다.(신문사 입사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기자로서의 삶을 연재하는 에피소드에서 자세히 다뤄보겠다.)
훈련을 모두 마치고, 한 주를 마무리하는 금요일 점심시간에 연락이 왔다. 최종합격했으니 현재 복무여건 고려해서 7월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이었다. 우선 기뻤다. 결실을 맺었고,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뿌듯함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의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상황을 아는 상태에서 채용을 하고 배려를 해주신 앞으로의 회사에도 감사했다. 무엇보다, 면접을 볼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해주신 부대에 감사했다. 사실 이 다음 찾아왔어야 하는 감정은 행복과 기대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다음 찾아온 감정은, 분주함이었다. 누군가는 전역 후에 긴 휴식을 계획한다. 또 누군가는 해외여행을 계획한다. 하지만 아무 연고 없는 타 지역에서 전역 후 바로 근무를 할 생각을 하다 보니 준비해야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우선은 집을 구해야 했다. 그리고 기자로서 적응하기 위한 공부와 준비들을 해야 했다. 동시에 대학원 종강시즌이 다가와 시험과 과제들을 마무리해야했다. 그런 분주함 속에, 나에게 2년 4개월이라는 추억을 선물해준 부대와 추억을 만드는 일도 빼먹지 않았다. 다만, 어리석게도 나 스스로는 전역자로서 배려 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같이 전역하는 동기는 이미 후임자에게 일을 모두 던지듯 넘기고는 지통실을 지키며 전역 준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다른 동기는 전역 전에 휴가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는 배려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실 다른 맥락 없이 이 짧은 부대차원의 배려(?)들을 들었을 때, 내심 부러움이 내 안에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나는 일을 아예 안하거나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던지듯 주고 싶지 않았다. 특히, 나는 복무 초에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지 못해 곤욕을 느꼈던 경험이 있어서, 내 후배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적극적으로 인수인계를 해주고 싶었고 계획을 세워서 그렇게 하고 있었다. 전역이 약 30일 가량 남은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예상이 가능했다. 예상되는 중요한 업무들을 잘 마무리하고, 나와 2년을 함께한 부대 사람들과 부대 사람들과 소소한 추억과 행복을 공유하는 것이 나의 예상이었다.
이런 나의 과분한 기대가 화가 되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도 나에게 자꾸 찾아왔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온전히 처리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예상한 업무들 외에는 사실 내가 부대 사람들과 추억을 공유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일을 하며 스트레스로 마지막까지 근무하기보다, 해야만 하는 일만 책임감 있게 하고 나머지는 추억을 쌓는 일에 매진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역하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다, 부대에 있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내 전역보다 중요한 현안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기대와는 달리 이전과 똑같은 지적이나 업무연락은 지속적으로 찾아왔다. 그러다보니 부대 사람들과 추억을 공유하는 일도 전혀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
나의 과분한 기대와 부대의 나를 향한 당연한 기대 사이에 충돌이 있다 보니, 약간 섭섭한 감정이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주를 이루는 감정이 된 것 같다. 그래도 이 글을 쓰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본다. 주말이 지나고 부대에 가서는 남은 시간들을 좀 더 소중하고 행복한 기억으로 채우기 위한 내 스스로의 노력을 해봐야겠다.
# D-20 ~ D-Day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한 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ROTC 장교로서의 삶을 행복한 기억으로 마지막까지 남기기 위해 남은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다. 간부들과 회식도, 용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같이 근무했던 다른 간부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도 내겐 지금 시점에서 1순위로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심리상담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다. 약 2주전부터 나는 국방부 지원프로그램을 통해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상담을 받아보고 싶다는 호기심에서 시작했지만, 나를 조금 더 바르게 이해하고 싶고,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며, 앞으로의 삶에 도움을 받기 위해 내겐 너무나도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심리검사도 하고, 주1회 상담사 선생님과 상담을 하며 나를 알아가고, 내 감정을 들여다보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생각을 해보다보니, 군에 입대하고 내게 ‘분노’와 ‘우울’의 감정이 이전보다는 많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쉽게 짜증이 나고 그것을 표출하는 것, 업무를 마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이전에 없던 깊은 우울에 잠기는 일 등 군 생활에서 얻은 수많은 좋은 점들의 이면에 부정적인 감정들도 숨어 있다는 자가 진단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역 전 남은 상담을 통해서 이런 감정들을 치유하고 새로운 힘을 얻어 생활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마지막은, 다음 직업을 잘 수행하기 위한 준비와 휴식을 잘 병행할 예정이다. 곧 떠나게 될 장기휴가기간 동안은 가족과 여행을 가고, 기도원에 가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낼 예정이다. 특히, [알짱알장, ROTC 장교의 삶] 연재를 마치고, 이제는 내 주요한 관심사에 대한 글도 연재를 계획하고 있다. 개신교 신앙에 대한 비판적 물음을 담아 종교와 사상을 주요 주제로 [다시스로 가는 이들에게] 초고를 작성 중에 있다. 글을 써내려가며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곧 연재도 시작해보고자 한다.
전역을 맞이하며
사실 마지막 에피소드를 쓸 때까지만 해도, ‘전역을 맞이하며’라는 에필로그를 아주 멋지고 거창하게 쓰고 싶었다. 하지만 위에 적은 것처럼, 전역을 맞이하는 나의 솔직한 감정과 심정은 굉장히 인간적이다. “제가 그동안 엄청난 일을 달성했어요!”, “나는 이렇게 멋진 군 생활을하고 전역합니다!”라는 자랑을 마지막 에피소드로 기록하고 싶었던 것은, 내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않은 기대였던 것 같다. 남들도 쉽게 경험하는 전역의 시점에 대우와 보상을 바라는 인간적인 기대와, 전역을 앞두고 찾아온 나태함, 그 속에서 발생하는 섭섭함과 짜증 등의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들이 ‘전역을 맞이하며’의 솔직한 감정이다. 이 솔직함을 기록하는 것이 더욱 값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나의 삶도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직업과 상황이 변해도 나에게 찾아오는 인간적인 감정은 동일하다. 그럴 때, 이 글을 다시 회상하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글을 보는 많은 이들에게 찾아오는 감정도 비슷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때로는 위로가 될 수 있다. 아직 전역을 하지 않은 후배 장교들이나, ROTC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곧 찾아올 수 있는 인간적인 감정들일 것이다.
전역을 맞이하며, 나의 인간됨을 다시금 되새긴다. 온전히 나의 힘만으로, 나의 의지대로 군 복무를 하고 전역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그간의 에피소드에서 등장했던 많은 사람들, 주변의 도움과, 내게 찾아오는 상황과 환경의 모든 변화들 속에서 시간이 흘러 남들과 같이 전역을 맞이하는 것뿐이다. 특별하지 않고 인간적인 지금의 시점이 내게 더 소중하다. 나의 부족함, 연약함을 극대화해서 알고 느끼게 해준 2년 4개월, 길게는 4년 4개월의 시간은 앞으로의 내 삶에 정말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신한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값지듯, 전역이 있기에 군인으로서의 삶이 값지다.’
전역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아무런 후회와 미련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전역의 때가 되니 ‘더 잘 할 걸’, ‘그 때 그러지 말걸’ 이라는 후회와 미련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의 때가 찾아왔을 때, 젊은 날을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전역의 시점에서 군인으로서의 삶을 후회와 미련으로 채우지 않기 위해 인생에 한번만 찾아오는 복무기간에 나름의 의미들을 채워가서 군에서 종사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나보다 더 훌륭한 전역을 하길 기도한다.
이로써 [알짱알장, ROTC 장교의 삶]을 마칩니다.
※ 다음 연재 예고 : 다시스로 가는 이들에게(To You, who go to Tarsh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