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내 말들을 복기한다. "괜찮아", "다시 해봐", "충분히 할 수 있어" 이 말들이 과연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교사라는 직업이 요구하는 일종의 의무였을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엔 그랬다. 교사 매뉴얼에 나올 법한 격려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말의 내용보다 말투의 온도를 먼저 읽는다는 것을. 특히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은 목소리의 떨림, 침묵의 길이, 숨결의 리듬으로 진심을 구별해 낸다.
고등학교 3학년 J학생과의 기억이 떠오른다. 안마 봉사활동을 앞두고 버스 안에서 그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제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요?" 그 순간 나는 망설였다. 섣부른 위로를 건네기엔 그 아이의 두려움이 너무 진짜였다. 나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단하게 말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못하는 건 없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야. 너는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날 돌아오는 버스에서 J학생이 속삭였다. "선생님, 다음에도 꼭 가고 싶어요." 그 한마디가 내 가슴을 두드렸다. 내 말이 정말 그 아이에게 힘이 되었구나.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만약 내가 다르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글쎄, 잘 모르겠는데"라고 했다면, "너는 원래 그런 게 서툴잖아"라고 했다면. 그 아이는 버스에서 내릴 때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말의 무게를 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어떤 날은 말을 꺼내기가 너무 무서워 침묵으로 하루를 보낼까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침묵도 하나의 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역시 메시지를 전한다. "너는 내 관심 밖이야", "너의 노력은 언급할 가치가 없어" 침묵은 이런 말들을 속삭인다.
그래서 나는 매일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어떤 말투로 아이들을 만날 것인가. 피곤하다고, 힘들다고, 세상이 각박하다고 그 무게를 아이들에게 옮겨놓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말투는 기분의 반영이 아니라 선택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기분이 나빠도 부드러울 수 있고, 지쳐도 따뜻할 수 있다. 그것이 교사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품위라고 생각한다.
나는 요즘 '호감 가는 말투'에 대해 생각해 본다. 호감 가는 말투는 진정성에서 나온다. 상대를 한 인격체로 존중할 때, 그 사람의 가능성을 믿을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의 결이다. 나는 한 명의 아이들도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자기 길을 찾아가는 그들의 용기에 내 말투에 스며들기를 바란다.
"잘하고 있어",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나는 이 말들을 자주 해야 한다. 하지만 의례적으로 습관처럼 하지 않으려 애쓴다. 정말로 아이가 나아지는 순간을 포착해서, 구체적으로 말하려 노력한다. "오늘 점자 찍는 속도가 어제보다 빨라졌어", "방금 그 문장 읽을 때 띄어쓰기를 정확하게 했어." 구체적인 관찰은 진심을 증명한다.
교직 생활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말은 씨앗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오늘 뿌린 말의 씨앗이 언젠가 그 아이의 삶에서 어떤 나무로 자랄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독초는 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가능하면 꽃씨를, 열매 맺는 나무의 씨앗을 심고 싶다.
교실을 나서며 나는 오늘 내가 한 말들을 떠올린다. 혹시 상처 주진 않았을까, 누군가를 외롭게 만들진 않았을까. 완벽할 수는 없지만, 의식할 수는 있다.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말투는 선택이라는 사실을.
내일도 나는 교실 앞에 설 것이다. 또다시 말의 무게를 느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 것이다. 이 말들이 아이들의 마음에 따뜻하게 닿기를,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고, 내가 해야 하는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