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수 적고 다른 남자아이들에 비해 활동적이지 않았던 나는 하교를 하면 여럿이 공놀이를 하러 운동장으로 뛰어가기보다, 우리 집 마당에서 혼자 놀기를 좋아했다. 철마다 꽃이 연달아 피고 지는 집에서 보낸 그 유년 시절을 돌이켜보면 여전히 선명한 몇 장면이 떠오른다. 돌 밑에 꽁꽁 숨어있던 공벌레를 손바닥에 놓고 유심히 관찰하던 기억이며, 화초들 사이에 조그마한 몸을 웅크리고 나만의 안식처라 여기던 일. 한 여름에는 매미를 잡으려고 감나무 밑에서 한참을 올려다보던 일이나, 한 겨울 눈이 소복이 쌓이면 잔디 풀이 섞인 눈을 뭉치고 던지며 온몸이 축축해질 때까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보냈던 시간들….
나이가 들고 학업을 위해서 홀로 그 집을 떠난 후, 점점 밀도 높은 도시로만 옮겨가며 살아온 기간이 어느새 그 고향집에서의 시간들을 훌쩍 넘어섰다. 그 이후로는 기숙사, 하숙집, 자취방들을 수도 없이 훑으며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나만의 마당 혹은 정원이랄만한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 도시의 높고 낮은 한구석, 협소한 공간을 옮겨 다닐 때 따져야 할 요소들 중 그런 공간은 넉넉지 않은 세입자에게 사치이기도 했고, 사실 크게 욕심을 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어릴 때의 기억이 그리운 것인지 아니면 대개는 어둡고 삭막한 공간에서 다른 생명체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인지, 매번 이삿짐을 풀어놓고 나면 나는 일종의 의식처럼 항상 화초를 하나씩 들여왔다. 문제는 물 주는 주기가 점점 뜸해지다가 결국 말려 죽이거나, 너무 많이 줘서 뿌리를 썩혀 죽이거나, 응달 식물을 직사광선에 태워 죽이거나, 양달 식물을 시름시름 앓게 해서 죽이거나 하는 것이다! 물론 볕이 잘 안 드는 공간이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원인은 달라도 결과는 항상 같았다. 부끄럽게도 과거의 나에게 식물은 정성스러운 관리가 필요한 반려 생명체가 아니라 단지 공간을 더 생기롭게 만들어주는 푸릇푸릇한 장식품에 불과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J와 이 집을 처음 보러 왔을 때 부동산 아주머니가 우리를 제일 먼저 이끈 곳은 커다란 문 너머의 발꽁(balcon)이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직하게 사크레쾨르 성당이 보였다. 유난히 쾌청한 봄이었고 파란 하늘 아래 흰 대리석 성당이 대비되어 더 가까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랜드마크 뷰'를 어필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것보다 발을 디딜 수 있는 그 발꽁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옆집과 격자형 창살을 사이에 두고 공유를 하는 구조였고, 서너 사람도 한 번에 올라서기 무서울 만큼 협소했지만 말이다.
그 자리에서 단번에 며칠 후 계약을 하기로 하고 나서는데 나는 이미 그곳에 어떤 식물을 길러볼지 구상하기 시작했다. '바빌론 공중정원처럼 꾸며 봐야지', '역시 유럽식 발꽁에는 붉은 제라늄이 어울릴 거야', '옆집 발꽁을 좀 가리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떤 넝쿨이 좋을까?',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도 키워보고 싶다'…. 비록 대지에는 닿아있지 못하고 공중에 붕붕 떠있더라도 드디어 남향에 화분을 놓고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나만의 초 소규모 마당이 생긴 것이다.
그 후로 몇 년이 흘렀다. 그동안 여러 식물을 가져다 심고 씨앗을 뿌리고 몇 가지 푸성귀도 길러보았다. 여전히 어떤 것은 말려 죽이고 어떤 것은 얼려 죽이는 실수를 반복했고 어쩌면 앞으로도 같은 시행착오를 겪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어두웠던 지난 자취방들에서 어쩔 도리 없이 시들어버린 화초들과 작별을 했던 때와는 다르다. 태양빛을 온전히 내리받는 공간이 있어서 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계절 내내 조금씩 변화하는 생명들을 마주하며 깨닫게 되는 것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마당의 화초 속에 몸을 숨기던 나의 마음은 어쩌면 이 존재들로부터 내가 보호를 받고 있다는, 막연하지만 확고한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