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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팔점사사 Jun 30. 2022

하늘은 하늘색

 계획에 없던 북한산 등반을 한 날. 등반이라기엔 20분 정도 걸은 게 전부였지만. 구기 계곡에 발을 담그려고 한 건데 계곡물은 말라있는 데다 출입 금지 팻말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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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친구랑 둘이 맥주 여덟 캔을 나눠 마셨다. 그러고도 부족해 친구 집에 있던 와인을 조금 마셨고, 술을 사러 편의점에 다녀올까 하다 말았다. 술을 못하는 다른 친구는 네가 술 이렇게 많이 마시는 건 너무 오랜만에 본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저녁 6시부터 새벽 4시까지 마신 거라 가능한 거였지만 내 설명은 들은 체 만 체. 친구는 계속 호들갑을 떨었다.


 집주인 친구의 집은 북한산이 보이는, 북한산까지 15분밖에 안 걸리는 곳에 있다. 어제는 양배추 쌈이 얼마나 맛있는지에 대해 얘기를 했고 오늘은 하와이에 가면 얼마나 좋을지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다 내가 문득 우리 30대에 하와이에 가자 했는데 한 명이 나는 내년에 30대야 해서 그럼 내가 30대 되면 가자. 이제 오 년 남았어했고 그 말에는 모두 동의했다. 실제로 우리가 5년 안에 하와이에 갈지 안 갈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에게는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했다. 나는 또 혼자 도요타 말고 현대 말고 유럽 국가에서 만든 오픈카 타고 하와이 해안 도로를 달리는 상상을 했다. 나 혼자 산다에서 본 적이 있어서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 계곡 얘기를 했는데 어쩐지 오늘 아침 다 같이 일어나서 라면을 끓여 먹은 것도, 테라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것도 피서 온 것 같아서 그런 것 같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러다 친구는 근처에 계곡이 있댔어 하고 말을 꺼냈고, 다른 친구는 수업이 있어 함께할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나도 저녁에 예약해둔 운동 생각에 이만 피곤해 집에 가겠다고 했고 친구는 별 수 없지 하며 옷이랑 수건을 바리바리 싸서 나왔다. 그렇게 우리 셋은 갈림길에서 찢어졌다.


 버스는 4분이 남았는데, 어쩐지 차가운 계곡물이 간절해졌다. 계곡을 좋아하기보단 무서워하는데도 친구랑 가면 집 가서 쉬다가 운동 가는 것보다 더 재밌을 것 같았다. 맞은편에는 혼자 열심히 걷는 친구가 보이고 나는 바로 전화를 했다. 친구는 퉁명스럽게 뭐야? 건너와하면서도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나를 가만히 기다렸다. 귀에 꽂은 이어폰 속 노래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산길이 힘들기보단 땡볕에 산 입구까지 가는 게 조금 더 힘들었다. 힘을 내기 위해 힘나는 노래만 듣는데 어쩐지 힘이 안 났다. 그래서 이어폰을 빼니까 오히려 힘이 났다. 새소리 바람소리. 어떨 땐 음악이 없는 게 더 좋기도 하구나. 나는 새로 산 신발을, 친구는 슬리퍼를 신고 나왔는데도 우리는 발을 빨리 담그고 싶어 우당탕탕 바윗길을 올랐다. 땀이 비 오듯 나서 어제 마신 술이 땀으로 다 나오는 기분이었다. 엄청 험한 바윗길을 올라 도착한 곳이 대충 계곡 근처인 것 같은데 출입 금지 팻말만 보이고 물은 얕다 못해 조금 고여 있는 수준이었다. 이게 계곡인가 봐. 어 이게 뭐야? 하다가 우리는 그냥 근처 바위에 앉았다. 그래도 산이라고 이렇게 시원하다 그치 하면서. 하늘의 색은 하늘색. 이렇게 당연한 게 멋져 보일 수 있구나 하면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나무 흔드는 걸 구경했다.


 말로는 물놀이 못 해서 아쉽다 하면서도 난생처음 계획 없이 오른 산이 좋아졌다. 우리는 산을 다시 내려와서 아저씨들처럼 감자전이랑 김치말이 국수, 막걸리를 시켜 먹었고 올림픽 다이빙 경기를 보면서 채점기준을 모르겠다고 투덜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버스를 반대로 탔지만 그거대로 길이 나있어서 집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내가 버스 타는 걸 지켜본 친구는 내가 버스를 반대로 탄 걸 깨달았을 즈음 나에게 전화를 해서 버스를 반대로 탄 것 같다고 말해줬다.


 우리는 어제 언제 사랑을 느끼는지, 지금 당장 뭘 먹고 싶은지, 이 집이 왜 좋은지를 얘기했고 나랑 같은 방에서 잔 친구는 너랑 자는 거 너무 오랜만이야 하면서 호들갑을 또 떨다가 금방 곯아떨어졌다. 아침에는 너무 더워서 깼고 설거지를 하는 소리로 친구 둘을 몽땅 깨웠지만 둘 다 눈도 못 뜨고 나와 놓고 투정 하나 없이 배고프다 라면 먹자 해서 라면을 끓여먹었다. 친구는 새로 산 담배가 맛없다며 나한테 피워보라 했고 나는 그 담배를 가지기로 했다. 우리는 며칠 전부터 공유한 옛날 사진을 하나하나 보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둘은 완전히 까먹었는데 남은 하나가 기억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가 이사해도 이 집 얘기를 많이 할 것 같아. 친구의 계약은 일 년이 더 남았는데 나는 벌써 아쉬워져서 그런 말을 했고 둘 다 응응 맞지 했다. 오늘 북한산을 오르면서는 앞으로 술 먹고 다음 날 코스는 북한산 등반인가? 하는 그다지 지켜지지 않을 것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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