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유형검사의 순기능과 역기능
"우리 담임쌤은 T라서 우리가 이렇게 이벤트 해드려도 절대 감동 안 받으세요!"
작년 스승의 날이었어요. 제가 들어가는 반 중에 한 반 어린이들이 리코더로 '스승의 은혜'를 연습해서 담임 선생님 앞에서 짠~하고 공연을 해드렸나 봐요. 본인들 생각에는 아주 멋지게 서프라이즈 공연을 펼쳤는데 담임 선생님 반응이 영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고 실망스러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제 눈에는 참 귀엽게만 보였습니다. 이런 에피소드는 또 있습니다.
"쌤, 친구가 혹시 쌤한테 '나 슬퍼서 빵 먹었어'라고 한다면 뭐라고 대답하실 거예요? 1번, 무슨 빵? 2번, 너 진짜 속상했구나. 왜? 무슨 일이야? "
"음, 난 2번."
"그럼 쌤은 F이십니다!!"
요즘 초등학교 고학년들은 MBTI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답니다. 서점에 가봐도 MBTI 관련 책을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자신에 대해 그리고 남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것 같지만, 사실 주류 심리학에서는 사람을 16가지 형태로 나누는 것에 대하여 그다지 신빙성 있게 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도 살면서 MBTI 검사를 여러 번 해 보았는데요. 변함없이 늘 INFP가 나오더라고요. 3~4년 전쯤에 중학교 진로교사를 하고 계시는 선배님을 찾아뵌 적이 있어요. 그분은 자비로 MBTI 전문가 과정을 따로 돈을 내고 배우셨대요. 그분께 제 MBTI를 말해드렸더니 말도 안 된다며 저는 E임이 분명하다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 편안한 사람 앞에서는 말도 많아지고, 에너제틱 한 사람이 되는데 사람들이 많은 곳은 기 빨려하고, 앞에 나서는 일을 극혐하는 체질인지라 스스로 I임을 확신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성격유형검사가 '자기가 보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최근 MBTI와 관련된 흥미로운 책 두 권을 읽었습니다. 첫 번째 책은 김영아 작가님의 '우는 법을 잃어버린 당신에게'라는 책인데요. 심리학과 그림책이 만남이 아주 기가 막혀요.
다소 딱딱하고 어려울 수 있는 심리 이론과 그림책이 함께 만나 멋진 책이 되었습니다. 어울리는 그림책을 함께 소개해 주는 아주 좋은 책이에요. 그중 구스타프 융에 관한 설명 중 제 눈을 사로잡은 구절이 있어요. 바로 MBTI에 대한 내용이었는데요, 열등 기능을 편안히 받아들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느 유형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모든 사람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융의 성격유형론을 알고 열등과 우월 기능에 대해 열린 해석을 한다면 사람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열등 기능을 억압하고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우월한 기능을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열등 기능이 있으면 '아, 내게는 아직 이 기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열등한 기능을 창피하다고 해서 억압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 문제가 심각해진다. 열등 기능은 단지 아직 덜 여물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는 법을 잃어버린 당신에게(김영아) P.91
요즘처럼 젊은 사람들이 자기의 성격을 유형화하는 시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주와 타로도 인기이고요. 이런 세태를 김영아 교수님께서는 '상대와 부딪히는 마음이 왜 그런 건지 검사를 통해 확인해서 각자의 다름을 이해받고 싶고 나아가 종잡을 수 없는 나의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싶은 욕망이 녹아있는 것'이렇게 분석하시네요.
다만 이것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말고 변화에 대한 강력한 열망과 사랑의 힘으로 평소 고수하던 자신의 방식을 과감하게 변형하고 수정했을 때, 비로소 살아갈 힘을 얻는 가능성은 더 커진다.
우는 법을 잃어버린 당신에게(김영아) P.91
익숙했던 자기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예를 들어 INFP인 저는 상대적으로 열등 기능인 ESTJ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까지 생각이 머물렀을 때 문득 또 한 권의 책이 생각났습니다. 이건 청소년 대상 서적인데요. 이승욱 작가님의 <나는 꽤 괜찮은 내가 될 거야> 란 책이에요.
'정신분석가가 10대에게 전하는 자기 이해 수업'이라는 부제가 인상적이어서 골랐습니다. 여기에도 MBTI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데요 앞서 소개한 김영아 교수님 말씀과 일맥상통한 내용이 있어요.
친구들이 "너는 애가 그렇게 공감도 못 하냐"라고 타박하면 "응, 나 T라서 그래."라고 응수하거나 자신의 게으름과 소극성을 "나 인프피라서 그래도 돼."라며 자기 핑계로 삼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INFP라면 앞으로 죽을힘을 다해 ESTJ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성격 유형 분류 도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 만들었다기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를 알기 위한 도구입니다.
나는 꽤 괜찮은 내가 될 거야(이승욱) P.37-38
죽을힘까지 써야 한다는 표현이 과격하면서도 지은이의 절박한 부탁 같은 느낌 같았어요. 아, 그런 것이구나. 이승욱 작가님은 '오락부장 스타일'의 학생에게 앞으로는 '기획자'나 꼼꼼한 '총무'역할도 해 보라고 조언하십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MBTI를 절반만 사용했고 무엇보다 이것을 오용했습니다. 이 결과를 자기 자신으로 결론짓는 것은 삶의 절반만(절반도 안 되게) 살겠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행여 이것을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했다면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자신을 이렇게 절반으로 가두고 나면 앞으로 살아갈 세상도 절반 속에서만 살게 되고 나머지 절반과는 계속 불화하며 살 것입니다.
나는 꽤 괜찮은 내가 될 거야(이승욱) P.38
제가 존경하는 한 담임 선생님은 교실이 언제나 정돈되어 있고 깨끗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본인이 ENFP라며 그래서 더 ISTJ처럼 계획을 세우고,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정리 정돈을 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고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그게 이 말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그래서 올해부터는 계획형, 정리형이 되어보려고 합니다. 즉흥성은 이미 차고 넘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