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의 어머니는 금와 병원으로부터 2차 간 매칭 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환자가 전국에서 몰려오니, 언제 간 이식 수술할지는 불확실하대. 일단, 간 매칭 검사부터 마치자.”
수라는 이제 반항할 기운도 남지 않았다. 이제 현실적인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수라는 아버지의 모습을 관찰했다. 아버지는 피골이 상접한 해골의 모습으로 평상에 누워 일광욕 중이었다. 그는 일터에 출근하지 않고, 병석에 누운 지 꽤 오랜 시일이 지났다.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가는 부친의 모습을 목격한 딸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대로 내가 간 이식 수술을 거부한 채 집을 나가면, 아버지는 곧 돌아가시겠지. 그러면, 가족들은 날 원망할 거야. 내 탓이라고 하겠지. 가족들의 구박과 학대에 못 이겨, 등 떠밀려서 결국 집에서 쫓겨날 거야. 코딱지만 한 고시원에서 쫄쫄 굶으며 살다가, 불행한 거지꼴로 혼자 죽어 가겠지. 민수라, 그게 네가 원하는 삶은 아니잖아? 차라리, 간 이식 수술에 임하고 떳떳하게 재산 분배를 요구하자. 그편이 차라리 더 현명하다!’
냉정히 생각하고, 실익을 따지니 결론을 내리는 것은 수월했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도망치려 해도, 빈털터리 대학원생 수라에겐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다.
수라는 금와 병원에서 2차 간 매칭 검사를 받았다. 어머니와 오빠도 함께였다. 지난번보다 확실히 검사 항목이 적었다.
간호사들이 모여 있는 사무실에서 남자 사회복지사를 만났다. 그는 간 이식 수술에 대하여 설명했다. 수라는 동의서에 서명했다. 사회복지사는 정신과 상담할 때, 기증자가 본인의 의지로 기증을 하는 건지 분명히 밝혀야만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런 절차가 있는 걸로 미루어 보아, 타인의 협박과 강요에 따라 간을 제공하는 사람이 오직 나뿐만은 건 아닌가 보네. 아, 불쌍해라! 어디 사는 누가 나처럼 불행하게 살고 있나? 아니, 어쩌면 간 이식 수술 후 수술대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지. 정말, 숨쉬기가 싫다……. 이렇게 구차하게 연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본인 뜻대로 살지도 못하고, 생을 이어나가는 게 과연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수라의 생각은 여기까지 미쳤다. 체중을 재고, 채혈한 후, 생활 의학 정신과로 가서 상담했다. 예약자인데도 불구하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검은 머리카락의 작은 체구를 지닌 젊은 여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의사는 그다지 질문이 많지 않았다. 수라는 가족에 대한 긴 사연을 그녀에게 털어놨으나, 아무런 조언도 들을 수 없았다. 상대의 역할은 그저 ‘듣는 것’이 전부인 듯했다. 어쩌면, 수습생일지도 모른다고 수라는 짐작했다.
‘듣기만 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업종이라니! 순 날로 먹는 직업이네. 과연, 공부 열심히 해서 의사할 만하다!’
수라가 간 이식 수술이라는 큰 산을 넘기에 앞서 넘어야만 하는 장애물은 바로 석사 졸업 논문이었다. 지도 교수는 제자에게 조언했다.
“민 선생, 몸에 칼을 대는 건 결코 좋을 리 없어요. 잘 판단하도록 해요. 평생 부모 원망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고 교수는 부모의 편도, 자녀의 편도 아닌 중립이었다.
“그리고, 논문 읽었어요. 논문은 이렇게 쓰면 안 돼요. 짧고 간결하게, 그리고 건조체로 분석하는 글이에요. 수필이나 소설처럼 문학이 아니란 말이야. 민 선생 글 보면, 혼자 신났어! 여행 명소 안내서 보는 느낌이야. 자, 여기서 문제 하나. 문과는 마음의 논리, 이과는 숫자의 논리라고 해요. 그렇다면, 예술계는 뭐일 것 같아요?”
수라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라서,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글쎄요. 예술에 어떤 논리가 있어야 하나요? 통 모르겠네요. 그냥, 즐거움을 위해 행하는 게 예술 아니에요? 예술과 문화를 향유함으로써, 현대인에게 정신적인 행복과 만족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음, 정답이에요! 예술계는 논리가 없어요. 그런 예술인에게 논문을 써서 제출하라는 건, 사실 불합리해요. 제출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고, 교수들의 심사를 통과해야 졸업하는 거잖아. 그거 합격하기 어려워요. 교수도 이것저것 평가를 받거든. 논문은 논리와 이성으로 쓰는 거라서, 감성을 다루는 예술인에게는 넘기 힘든 문턱일 수밖에 없죠.”
“만화학과는 작품 발표나 전시회로 졸업하는 게 차라리 더 도움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아무래도 작가를 양성하고, 배출하는 게 만화학과 존재 이유이고, 목표이니까. 그런데, 이건 학교 규정이라서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어요. 석사 과정은 졸업 논문 1편만 제출하면 되지만, 박사 과정은 더 힘들어요. 소논문 2편에 졸업 논문 1편, 논문 총 3편을 써야 하거든. 이건 확실히 잘못됐어! 소논문 1편, 졸업 논문 1편으로 줄이자고 내가 계속 학교 측에 건의 중이긴 해요.”
“다행이네요. 제가 박사 과정 학생이 아니라, 석사라서요.”
“민 선생은 앞으로 여름 방학 내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까지 학교 나와요. 논문 작업하도록 해요. 이대로는 졸업 불가능해. 졸업하고 싶으면, 내 말 들어요.”
“네, 그럴게요. 병원에서 연락 왔어요. 간 이식 수술 날짜 정해졌대요. 다행히, 졸업 이후예요.”
“수술하기로 결정 내린 거야?”
“결정한 게 아니라, 결정 당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거예요. 차라리, 잘 된 걸까요? 수술 전에 논문 합격해야, 최종 학력 석사 졸업이 되겠네요. 수술이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면, 죽을 테니까요.”
“죽는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요.”
“한국은 군대가 아닌데도, 이미 계급 사회예요. 저의 집이 그렇거든요. 제가 막내라서, 서열이 가장 낮아요. 제 의견은 씨알도 안 먹혀요.”
“가장 자살을 많이 하는 체질이 소음인, 그다음에 태양인.”
“무모하네요. 자살을 왜 해!”
“본인이 범죄를 저질러도, 자살하지 않는 체질이 소양인이에요.”
“생존해야죠.”
“태양인, 소음인은 맨정신에 자살해요.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은데, 빠져나갈 수 없을 때.”
“전 살아서, 증명할 거예요. 죽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죽으면 다 끝이지!”
“태양인, 소음인은 정신이 더 중요해. 죽어도 내 정신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죽으면, 본인만 손해예요.”
“바로 그 점이 민 선생은 태양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죠.”
“소양인은 이렇게 현실적이야. 태양인은 아마 이렇게 말하겠죠. ‘나를 증명할 필요가 뭐 있나요?’하고. 내가 말하는 태양인의 죽음은 사실은 희생이에요.”
“숭고하네요. 예수님이 생각나는데요?”
“예수님이 태양인이에요. 예수 같이 사는 사람들은 태양인이에요. 태양인은 긍정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서 사이비 교주가 되지는 않아요. 우리나라 교주들이 신자들만 죽고 혼자만 살잖아. 대부분 소양인이에요. 육신은 안 바쳐. 태양인은 나를 보면 답답해서, 도망가요. 민 선생은 나랑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야. 한국 사회는 태음인과 소양인이 찰떡궁합이거든. 한국인 중에 가장 흔한 게 태음인이고, 소양인이 그다음으로 많아요. 난 태음인이고, 민 선생은 소양인이야. 민 선생 처음 봤을 때,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고, ‘얜 양인이다!’하고 생각했지. 성격 보면, 태양인은 아닌 것 같고.”
“그런가요? 태양인이 간이 작고, 화병 나서 일찍 죽는다던데요.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제가 모두 유전적으로 간 면적이 작다고 하니, 혹시 태양인인가 싶었어요. 아버지도 본인이 태양인이라고 주장하던데.”
고 교수는 심리학과 사상체질, 그리고 MBTI 등 인간의 성격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연구한 내용을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줬다. 수라에게는 어디에서도 접하지 못한 흥미로운 관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