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민은 비록 수라의 연인은 아니었으나, 당시 그녀에게 누구보다도 가까운 존재였다. 충민은 수라를 처음 만난 날부터 즉시 운동을 시작했고, 몸을 단련했다. 3개월쯤 지나자, 충민의 외모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봐요, 예전보다 어깨 훨씬 넓어지지 않았어요?”
“엉, 그러고 보니 요즘 너 점점 날씬해지네? 처음 봤을 때랑 비교하면, 용 됐다! 첫 만남 땐, 완전 '아니올시다'였다고. 너 취업 성공하면, 다 내 덕인 줄 알아!”
“고마워요, 누나.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여자들이 힐끔 거리는 시선이 느껴져요.”
“어쭈! 그래서, 좋디?”
“아뇨, 전 누나한테 칭찬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충민은 수라가 이제까지 본 사람 중, 가장 말을 듣기 좋게 하는 남자였다.
‘이러니, 여사친이 많지! 말을 참 예쁘게 한단 말이야? 사람은 외모보다 성격이 중요하다더니, 맞는 말 같네.’
사실, 수라는 충민과 정식으로 교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경제적 요건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나보다 한참 어리니, 자리 잡고 돈벌이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지. 어휴, 나도 아직 학생이잖아? 누굴 키울 처지가 못 돼. 나 혼자 성장하기도 힘들다!’
수라가 직접적으로 충민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진 않았으나, 충민도 역시 뚜렷이 구애하지 않았다. 마치 수라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충민의 눈빛이나 태도는 수라에게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긴, 네가 어디서 나 같은 여자를 만나 봤겠니? 나한테 푹 빠진 티가 확연하군!’
말 차기
민수라
밤이 늦도록
집에 안 가고,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너.
어서 돌아가라고
줄곧 핀잔을 주는데,
눈치코치도 없이
꿈쩍도 않는다.
피곤한 나머지
내내 눈을 감은 채
대화를 이어가는데,
그는 말짱하다.
가끔 내가 눈을 떠
그를 바라보면,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은
꿀이 뚝뚝 묻어난다.
"누나는
일찍 자야 해서,
이만 가주면 좋겠어.
미안, 피곤해서 그래."
그는 뭉그적대며
마지못해 일어난다.
이런 게 바로
발차기 아니고 말 차기!
충민은 모교 인근에서 자취하며, 파트타임 잡과 취업 준비를 병행했다. 외출하면 마땅히 머물 곳이 없고, 지출이 부담스러우니 수라는 종종 충민의 자취방에 놀러 왔다. 나름 절약하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 충민은 끼니를 거의 거르는 모양이었다.
“너 식품 공학과라며, 요리는 왜 안 해? 집에서 밥을 아예 안 먹어? 요리 도구가 전혀 안 보여서.”
“일하는 식당 가서, 식사 해결하면 돼요.”
“너, 거길 매일 가는 건 아니잖아. 근무 안 하는 날도 분명 있을 텐데! 그럼, 너 굶어서 살 뺐니? 너, 금방 요요 현상 온다?”
충민의 설명에 의하면, 졸업생들 중 남자들은 대부분 식품 관련 회사에 취업하고, 여자들은 주로 영양사에 지원한다고 했다.
“그럼, 너도 식품 관련 회사에 지원하겠네? 어디 생각하고 있어?”
“대기업 지원하려고요. 합격하면, 참 좋겠네요. 초봉이 X, XXX만 원이거든요.”
“와, 연봉 높다! 일할 맛 나겠다. 근데, 대림시에는 대기업이 없잖아?”
“맞아요. 주로 경상권에 있어요.”
“아, 멀다! 너 취업하면, 우린 이제 보기 어렵겠네.”
“아니에요. 멀리 떨어지더라도, 누나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올 거예요.”
몇 개월 후, 충민은 취업에 보란 듯이 성공했다. 그는 대림시를 떠나기 직전까지 수라와 함께 시간을 보냈으나, 수라는 이후 충민을 다시 만나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충민에게 연락이 왔다.
‘대림시 올 때마다, 누나 생각해요. 잘 지내요?’
그러나, 수라는 매정하게 응답했다. 충민은 착하고 다정했지만, 간혹 답답한 구석이 있었기에 수라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연락하지 마.’
훗날, 수라는 충민에 대한 기록들을 발견하고 추억에 젖었다. 당시 충민과 수라의 관계에서 서로가 느꼈던 오묘한 감정을 가늠할 수 있는 재밌는 글귀였다.
드라이어와 귀신
민수라
충민의 자취방에서
양치를 하는데,
그가 드라이어를 들었다.
“드라이어 쓸 때만,
항상 정전이 되는 거 있죠.
진짜 답답해!”
난 화장실에서 그 얘길
듣고만 있었다.
별로 안 궁금하고,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데도
굳이 그걸 보여줬다.
“어라, 왜 잘 되지?”
당황한 충민은 멍하니,
드라이어를 든 채 서 있었다.
“네 방에 사는 귀신이
날 보고 놀라서,
도망간 모양이다.”
내가 말했다.
“맞아요!
누나는 기가 세니까.”
… 아닌데!
나는 기가 센 게 아니라
야무진 거야.
어리숙한 어리바리 충민.
소유와 자유
민수라
요즘 들어 충민은 부쩍
반항이 늘었다.
은근히 대든다.
원래 말 잘 듣고,
순한 양 같은 남자인데...
그는 함께 있는 게
좋다고 했다.
누나로서
좋아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질투를 한다.
그는 그게
사랑이라 생각한다.
소유욕,
그거 무서운 거다!
나는 네 것이 아니야.
난 자유의 몸이라,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다 내 맘이지.
우리 같이 있을 때,
서로 아껴주고 위해주자!
나는 그가 필요하고,
그도 내가 필요하다.
그와 함께 나가 놀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자, 오늘도 즐겁게 놀자!
충민이 취업에 성공했을 무렵, 수라는 논문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예술인이 창작이나 전시, 공연하는 게 아니라 조사하고, 분석하려니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수라의 전공은 만화학이었고, 캐릭터에 대해 연구 중이었다.
‘아, 망할! 즐거운 여름 방학에 학교에 나와서 작업 중이라니…… 어휴, 반드시 졸업하고 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