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다랑의 생일 기념으로 피자 뷔페를 방문했다.
"여기 피자 종류가 다양해서 참 좋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럽게 식당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데, 닫힌 상점 문을 보고 다랑이 질문했다.
"Seacucum이 뭐야?"
모르는 영단어였다. 상호 옆에는 이해를 돕기라도 하는 듯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확신은 없었으나, 그럴 것 같아서 대답했다.
"해삼 아니야?"
어학사전을 검색하니, 과연 해삼이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여기 뭐 하는 곳이야? 해산물 팔아?"
"아니, 칵테일 바라는데."
"아, 그래? 그럼, 다음에 와보자. 3월 14일, 화이트 데이 기념으로 오는 거 어때?"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예정일이 됐다. 집에서 석식을 먹으며, 예약했다.
"몇 시 개점이야?"
"저녁 8시."
"버스 탈까, 택시 탈까?"
버스를 탈까 고민했으나, 약 40분이나 걸렸다. 너무 긴 시간이어서, 우리는 택시를 선택했다.
"너, 커플링 왜 안 꼈어?"
"아, 깜빡했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직 20시가 채 되지 않았으나, 불빛이 보였다. 잠시 망설였다.
"아직 개점 시간 전인데, 들어가도 될까?"
"일단 들어가자."
주점 출입문을 열고, 실내로 입장했다. 어둠 속에서 조명을 받으며, 젊은 여자 한 명이 우리를 맞이했다.
"저기, 들어가도 될까요?"
"네, 어서 오세요."
그녀는 연신 미소로 응대했다. 보기 드문 서비스 종사자라고 생각했다.
"어디 앉을까?"
실내를 훑으며, 다랑에게 물었다.
"바에 앉는 걸로 아까 예약하긴 했어."
"편하신 곳에 앉으세요."
매장 내부는 아담했다. 바와 테이블, 그리고 다트 게임기가 두 대 있었다.
"술집에는 다트 게임기가 흔하더라. 왜 있는 거야?"
다랑이 질문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벽에 걸린 해삼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통유리창 너머로 바깥 풍경이 보였다. 한산한 금요일 저녁이었고, 우리는 마수걸이였다.
"시그니처 먼저 맛보자. 알베로, 성한 No.1 주문할게요."
"아, 그건 현재 재료가 없어요."
"아쉽네요. 그럼, 홍월과 엘더 스파클링은 가능한가요?"
여자는 평범한 직장인인데, 일손이 부족해서 잠깐 도우러 왔다고 했다. 1년 6개월 만에 출근한 거라고 했다. 사장님이 바쁘셔서, 오늘은 부재중이고, 21시 30분에 다른 바텐더가 출근 예정이라고도 했다.
'사장님 솜씨를 맛보지 못하다니, 안타깝다! 저 어린 아르바이트생이 과연 칵테일을 잘 만들 순 있을까?'
걱정 반, 의심 반이었다. 여자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질문하며 칵테일을 제조했다.
홍월과 엘더 스파클링 모두 청량감이 느껴지는 칵테일이었다. 홍월은 달짝지근한 반면, 엘더 스파클링은 깔끔한 맛이었다.
"난, 홍월이 더 맛있어."
붉은 빛깔이 보기 좋았다. 크림치즈를 듬뿍 바른 크래커를 곁들였다. 치즈가 부드럽고, 맛있었다.
이어서, 낯선 칵테일들만 골라 주문했다. 동해와 카타르시스도 역시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동해는 이름에 걸맞게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 빛깔이었고, 소다 맛이었다. 숟가락이 없어서, 빨대를 휘저어 어렵게 체리를 건져서 입에 넣었다. 하나는 다랑에게 건넸고, 남은 하나는 내가 먹었다. 씨가 씹혔다.
"어, 씨가 있네. 이거 집에 가져가서, 화단에 심을까?"
카타르시스는 도수가 높을 거라고 기대했으나, 얼음이 많아서인지 밍밍했다. 다랑은 내심 실망한 눈치였다. 대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상호가 왜 해삼이에요?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여자에게 질문했다.
"사장님의 형님 별명이 해삼이라서, 그렇게 지으셨대요."
"하하, 별 의미는 없군요."
흰 와이셔츠를 입은 단신의 남자가 출근했다.
"오랜만이야. 연락 좀 하고 지내."
근무자들은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 주고받았다. 검정 상하의를 입은 아르바이트생은 곧 말없이 조용히 퇴근했다. 아가씨가 사라진 후, 그녀의 미소에 대해 언급하자 남자가 대답했다.
"그 미소에 반하신 분들이 많으시죠. 혹시, 파우스트 드셨나요?"
"아뇨, 파우스트는 안 마셨어요."
"저희 가게는 파우스트가 특별해요. 파우스트 어떠세요?"
"오, 그래요? 그럼 그걸로 주세요. 남자 친구가 도수 높은 술 좋아하거든요. 보스턴 쿨러는 도수가 어때요?"
"파우스트에 비해 도수가 낮은 편이에요."
"네, 저는 그걸로 할게요."
남자는 불쇼를 선보였다. 푸른 불빛이 영롱하게 빛나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서, 영상 촬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신기했다. 과연, 전문가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화려한 기술이 이미 다 끝나버렸다. 그는 와인 잔을 눕혀서 술을 데웠는데, 이 모습은 다행히 영상으로 남겼다.
"불을 보니, 예전에 미술 수업했던 초등학생이 떠오르네. 그 애가 나한테, 가장 뜨거운 불은 몇 도냐고 질문한 적이 있거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라서, 당황했어. 인터넷 검색해서 알았지. 파란 불이 가장 뜨겁다는 걸. 수업 태도도 좋고, 외모도 준수한 남학생이었어. 겨울 방학엔 미국으로 지질 캠프를 가기도 했는데, 그땐 나도 따라가고 싶더라!"
다랑이 파우스트를 음미했다.
"오! 술이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있나?"
"어때요? 맛있죠?"
보스턴 쿨러는 파우스트에 비해 비교적 평범했다. 세 번째 잔이라서, 머리가 띵하고 배가 불렀다. 그만 마시고 싶었지만, 가격이 비싸서 남기기엔 아까웠다. 그냥 쭉 들이켰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 생각하던 차에, 바텐더가 제안했다.
"서비스로 자몽 칵테일 드릴게요. 어떠세요?"
"와, 좋아요! 고맙습니다."
"대회에 2번 나가서 선보였는데, 결과가 좋진 않았어요."
"저런, 그러셨구나!"
"원래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새 이름을 붙여주실래요?"
"음, 자몽 라벨 어때요?"
술잔에 라벨이라는 영단어가 보이길래, 단순히 결합했다. 화장실에 다녀온 다랑은 더 창의적인 이름을 구상했다.
"자몽의 별명이 금단의 열매래. 금단의 열매 자몽, 줄여서 금자 어때?"
"이야, 신박하다!"
금자는 자몽의 쌉싸름한 맛이 매력적이었다.
"다른 곳에선 맛보지 못한 맛이라서, 좋네요. 금자."
"고맙습니다. 사장님께 말씀드려서, 메뉴 추가하려고요. 서비스로 한 잔 만들어 드릴게요. 어떤 거 원하세요?"
바텐더가 다랑에게 물었다. 아까 퇴근한 대타가 다소 미숙했기에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 배려하는 듯 느껴졌다.
"카타르시스 도수가 높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좀 약했어요. 좀 더 강하게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슬슬 일어날 태세를 취할 때, 안경 쓴 바텐더가 한 명 더 나타났다. 남자 손님 네 명이 우르르 몰려와서, 소란스러웠다.
불꽃쇼가 인상적이었고, 대구 출신 바텐더의 창작 칵테일이 감미로웠으며, 대표자를 만나지 못해서 미련이 남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봄밤이었다(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