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서 제출까지 남은 기간은 정확히 한 달. 김현우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제안서 본 작업에 착수했다. 회의에서 정리된 내용을 바탕으로, 고객 요구사항에 정확히 맞춘 구조와 흐름을 작성해야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안요청서(RFP)를 다시 분석하는 일이었다.
"절대 목차 순서를 바꾸면 안 돼. 평가자들이 가장 민감하게 보는 부분이지. 특히 제안서는 비교평가, 상대평가 방식으로 점수가 매겨지기 때문에, 목차가 기준에서 벗어나면 감점으로 직결된다."
김현우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이며, 제안요청서에 명시된 형식과 기준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이 작업은 단순한 문서 작성이 아니었다. 각 항목마다 심사위원이 점수를 어떻게 매길지를 예측하고, 논리와 흐름을 재배열하는 전략적 설계였다.
“기획 배경 – 추진 목적 – 시스템 구축 방안 – 기대 효과 – 유지보수 전략 – 예산 산출 근거…”
목차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전장이었다. 그는 고객 입장에서 어떤 메시지가 가장 설득력을 갖는지, 어떤 문장은 평가자의 마음을 움직일지를 고민하며 글을 구성해나갔다.
오지수는 기술 세부 항목을 정리해 나갔고, 디자인팀은 김현우의 요청에 따라 UI 시나리오 흐름도를 작성하고 있었다. 개발팀은 이미 예상 개발량과 투입 공수 분석을 시작했다. 김현우가 요청한 각 부서별 대응은 빠르게 이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특히 몇몇 부장급 인사들은 김현우가 대리급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 중심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 껄끄러운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지금 저 대리 하나가 대표 직속이라고 너무 나대는 거 아닌가?”
김현우는 그 시선들을 모른 척하며 계속 집중했다. 결국 결과로 증명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날 오후, 김현우는 대표이사에게 초안을 보고했다. 대표이사는 조용히 문서를 훑으며 말했다.
“이 흐름이면 심사위원들에게 인상 줄 수 있겠어. 다만 기술력만 강조하지 말고, 예산 타당성과 운영 전략도 분명하게 보여줘야 해.”
“예, 준비 중입니다. 전체 시스템을 3단계 Phase로 나누고, 각 단계별 성숙도와 투자대비 효과를 수치로 제시하겠습니다.”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번 사업이 단순 수주가 아니라 장기 고객 관계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점, 잊지 마.”
김현우는 조용히 답했다.
“그 부분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또 하나의 과제를 되새겼다.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주하기 위해선 기술과 기획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공사업 특성상 영업력이 매우 중요하다.
현장의 흐름을 읽고, 고객과의 접점을 실시간으로 챙길 수 있는 능동적인 영업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김현우는 곧 적임자를 떠올리며, 내부 영업부서와 협업 방안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기술영업까지 가능한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그는 기술에 대한 이해도와 고객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인재였다. 김현우는 이번 프로젝트에 반드시 그를 투입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이 프로젝트 하나만을 위한 영업이 아니다. 앞으로 10년 뒤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미래에는 지금까지의 영업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가 상상하는 새로운 형태의 영업, 그것은 '평가위원 영업'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지만, 언젠가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 될 것이다. 누구보다 먼저 평가자와 산업의 흐름을 설계할 수 있는 전략형 영업. 그것이 결국 시장을 선점하는 결정적 무기가 될 것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김현우의 집중도는 더욱 높아졌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스며드는 가운데, 그의 노트북에는 『제안서_공공MEAPLBS_v1.3』이라는 파일명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화면을 확인하며, 부족한 부분을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번 제안은 단지 한 번의 사냥이 아니라, 향후 수많은 전장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더는 을로 남지 않기 위한 사냥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