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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기우진 Jul 14. 2024

이차대전 중 & 후의 독일과 일본사회의 대응 2

과학과 정치, 냉전

*표지사진: 오펜하이머와 냉전의 시발점이 되었던 원자탄


그럼, 나치독일과 일제가 패망한 후, 독일과 일본사회는 자신들의 과거를 어떻게 반추했을까.


1960년대는 전세계적으로 폭풍의 시대였다. 


한국에서는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났다. 1960년대 후반에는 유럽과 일본의 거리와 대학교정에서 그 당시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젊은 세대와 기성대세간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그 와중에 독일 청년들은 부모세대에게 나치독일하에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였는지를 통렬하게 묻기 시작했다. 그러한 사회적분위기에 서독에서 연합군의 신탁통치가 끝난 1949년부터 집권한 중도우익성향인 기독민주당 (Christian Democratic Party)의 장기집권이 1969년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이 집권을 하고, 윌리 브란트가 서독 수상이 된다. 그 다음해인 1970년 12월 7일, 윌리 브란트 (Willy Brandt) 는 폴란드를 공식 방문했을때, 바르사바에 위치한 The Monument to the Ghetto Heroes 를 방문하여, 헌화를 바치고 무릎을 꿇었다. 전쟁이 끝난지 25여년이 지난 때다. 브란트가 그 기념탑에서 무릎을 꿇은 장면은 나치독일이 2차대전 중에 저지른 반인간적 범죄에 대한 독일정부차원의 최초의 공식적이고 진정한 속죄를 상징했다. 그에 힘입어 서독은 폴란드와 국경문제해결을 포함한 바르사바조약을 맺고 외교적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었다. 그후, 메르켈을 비롯한 독일 수상들은 매년 12월이 오면 과거 나치독일의 전쟁범죄를 참회하는 공식성명을 발표하곤 하여 왔다. 잘못된 과거와의 단호한 단절은 독일이 전후 유럽의 중심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정신적 토대가 되지 않았을까.


일본에서는 1959년과 1960년에 일본영토에 미군기지를 유지하는 조약에 반대하는 안보투쟁이 있었다. 이 안보투쟁은 미국의 냉전정책에 일본이 중립적 진로를 택하기를 원했던 대중적 투쟁이었다. 안보투쟁이 실패로 돌아간 후, 1968년과 1969년에 일본내 대학에서는 대학생들의 데모가 빈번해졌다. 처음에는 학내문제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미국의 베트남전쟁과 미일안보조약에 대한 반대로 이슈가 바뀌었다. 이 운동들은 그러나 독일에서 와는 다르게 미군정이후에 일본을 지배해온 보수 자민당정권으로부터의 정권교체를 이루어 내지 못했다. 그 실패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본 주둔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전후에731부대와 같은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철저한 심판과 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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