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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Peace Particle & APEC

by 요기남호

* 표지사진: CERN 의 한 거대한 검출기


일주일 전에 영화를 하나 보았다. 다큐멘터리 영화 <The Peace Particle>.


이곳 샬롯스빌에서는 매년 가을에 영화제가 열린다. 버지니아대학이 주최하는 Virginia Film Festival (VAFF)다. 이 영화제에는 한국영화도 3-4편 보여준다. 이번해에는 한국영화를 모두 저녁 늦게 상영을 하여, 난 가보진 못했다. 대신에 일요일 오후에 상영한 다큐 <The Peace Particle>을 보았다.


이 다큐멘터리 <The Peace Particle>은 거대한 입자 가속기의 회전보다 더 오래, 더 깊이 맴도는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한다. ― “과학은 전쟁 이후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CERN,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탄생사는 단순히 과학 기술의 진보를 보여주는 연대기가 아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폭탄의 섬광을 본 과학자들이 다시금 자신들의 역할을 되묻는, 일종의 윤리적 각성의 서사이다. 전쟁의 파괴 속에서 과학은 그토록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그 힘이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을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 불안과 회한 속에서 탄생한 기관이 바로 CERN이었다. 전쟁의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협력과 탐구의 언어로 세계를 다시 써 내려가려는 시도였다.


CERN의 건설 초기 자문 과정에 오펜하이머와 하이젠버그 모두가 관여했다. 두 사람은 직접 설계나 행정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각각 이념적 상징과 지적 방향성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의 맨하탄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오펜하이머는 “전쟁을 넘어선 과학의 공동체”를 역설하며 미국과 유럽의 연구 협력을 제안했고, 나치독일 하에서 원자탄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하이젠버그는 “파괴의 물리학을 평화의 물리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했다. 그들의 이름은 CERN 창립을 이끈 유럽 물리학자들의 회의록 속에서, “윤리적 기원(ethical origin)”이라는 말과 함께 언급된다.


이 다큐멘터리는 거대한 원형 터널 속을 질주하는 입자보다 더 보이지 않는, 그러나 훨씬 근본적인 움직임을 포착한다. 그것은 과학자들의 양심이다. 그들은 한때 파괴의 기술을 만들던 손으로, 이제는 우주의 기원을 탐구하며 평화의 의미를 묻는다. “피스 파티클(Peace Particle)”이라는 제목이 상징하듯, 여기서 입자는 더 이상 무기가 아니라 화해의 언어, 공동의 이해를 향한 열망으로 변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지 낭만적인 이상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냉정하게 묻는다. 오늘날의 CERN이 과연 그 창립의 이상 ― 전쟁 이후의 화해와 협력 ― 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가? 국제 정치의 긴장이 다시금 연구 협력을 위협하고, 과학 기술이 군사적 응용으로 다시 흡수되는 현실 속에서, 평화의 입자는 여전히 불안정한 궤도를 돈다.


그럼에도 <The Peace Particle>은 과학을 믿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사유하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다. 다큐는 인터뷰와 아카이브 영상을 통해, 인류가 스스로 만든 가장 거대한 실험 장치를 통해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 동시에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염원이 깃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과학은 언제나 양면적이다. 그것은 원자폭탄을 낳았고, 또한 인터넷을 낳았다. 하나의 입자는 파괴의 불씨가 될 수도, 평화의 매개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평화의 입자”란 실제의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과학이 인간의 윤리와 만나는 지점, 그 상징적 공간에 놓인 은유이다.


결국 이 다큐멘터리가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지식은 중립이 아니며, 탐구의 방향은 선택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은 언제나 인간의 몫이라는 것.


최근에 경주에서 열린 APEC을 지켜 보며, APEC이 내세우는 “공존과 번영(Coexistence and Shared Prosperity)”의 담론과 이 다큐의 메세지가 맞닿아 있지 않나란 생각이 들었다. APEC이 주장하는 것은 단순한 경제 협력의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차이와 긴장 속에서도 상호 이해를 가능케 하는 제도적 실험, 즉 인류가 다시 ‘공동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시도다. CERN이 물리학의 언어로 그 실험을 수행했다면, APEC은 정치와 경제의 언어로 그 이상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두 실험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지만, 근본적인 철학은 동일하지 않을까.

과학이든 경제든, 지식이든 제도든, 그 궁극적 목적은 하나뿐인 지구상에서 모든 인류가 지속 가능한 공존의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CERN의 터널을 달리는 입자들은 단지 우주의 기원을 찾는 것 뿐만 아니라, 인류의 협력 가능성에 대한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기에 ‘평화의 입자’는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지식을 사용하느냐, 어떤 관계 속에서 번영을 나누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윤리적 입자이다. 오펜하이머와 하이젠버그가 그 가능성을 위해 서로의 그림자를 마주했던 것처럼, 오늘의 세계 또한 그들의 대화를 다시 이어야 한다.


“당신의 지식은, 당신의 문명은, 평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 APEC에서 인상적이었던 사진 두장을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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