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선택
특수교육을 위해 대학을 들어가 처음으로 교수님과의 만남에서 기억나는 말은 "용꼬리를 하느니 뱀대가리"를 하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였다. 소심한 나는 그 당시 말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그래도 용은 용인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후 한참 잊고 살다가 박사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낯선 미네소타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차이점은 유난히도 푸른 눈과 금발머리의 백인들이었다. 대충 다양한 인종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과 그동안 한국에서 보아온 미국인에 대한 인식과는 차이가 있었다. 아는 사람 한 명도 없이 낯설고 적막한 환경에서의 박사과정을 향한 나는 좀 두려운 마음으로 움츠러들었다.
한몇 주일 후에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나는 너무도 반가워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깨너머로 힐끔 쳐다보곤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곤 곧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특수교육학과에는 별로 유학생들도 없었고 나이가 들어 유학을 하는 나는 유학생과의 공통분모가 없어 자연스럽게 미국학생들과 어울리곤 했다. 미국친구들과 나는 매주 금요일에 문화탐방이란 명목으로 다양한 음식점도 다니고 영화 연극 스포츠게임을 관람하며 함께 즐겁게 어울렸다. 그러나 일을 할 때와 학교에서는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외감 같은 느낌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누구도 대놓고 차별을 하는 것은 아니라서 콕 집어 차별이라 말할 수 있지는 않았다.
내 영어를 못 알아들은 척하며 "What?"이라며 다시 말해봐 하는 난감한 표정을 하는 경우도 꽤 부딪쳤었다. 내가 못했을 때와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정도야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며 꾀 찬 눈치로 가늠이 가능했다. 미국은 한국보다 좋게 이야기하면 여유롭게 일처리를 한다고 볼 수도 있고 그냥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비추어 보면 느려터진 태도라고 볼 수도 있다. 대부분 서류를 내거나 일 처리를 할 때 보통 2-4주 정도가 걸린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거기에도 은근한 차별은 있다. 내가 부탁한 일은 2-4주 중에 4주에 가까이 처리를 해주고 미국학생들이 요구를 하면 2 주 쪽에 가깝게 또는 그보다 빨리 해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그저 내가 영어를 못해서 일어나는 문제려니 하고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을 혼자 삭히곤 했다.
캘리포니아로 오자 가장 큰 변화는 너무도 마음이 편했다는 것이다. 그 편안함은 원하던 교수라는 직업을 얻었다는 단순한 생각에서가 아니었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주변에 많이 있고 내가 쓰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 사람도 없었다. 나보다 영어를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영어에 심한 악센트가 있어 나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내 영어를 깔보는 사람도 없고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스스로의 문제를 인식하고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장애학생을 위한 통합교육의 중요성을 특수교육에서만 강조를 한다. 일반학급에 있는 비장애학생들이나 부모들은 장애학생이 통합이 되면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비장애학생이 교사의 시간을 빼앗아 교육에서도 손실을 입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구에 의해 밝혀진 사실은 그와는 오히려 반대인 것이다. 통합교육을 했을 때 장애학생에게 학문적 성취도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그들이 사회성은 크게 좋아진다는 것이다. 오히려 비장애학생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쉽게는 남을 배려하는 이타심의 향상뿐만 아니라 학습에서 어려움을 겪는 장애학생을 경험하면서 보다 나은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용기를 얻어 비장애학생의 자존감과 학습성취가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용의 머리가 될 수 있는 능력과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가진 사람을 인정하고 교육해 배출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생물체는 머리만 있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당연히 몸통도 꼬리도 있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학교활동과 교육에서 머리의 역할을 할 기회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기회를 갖음으로써 자존감과 자신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공부만 잘하는 사람보다는 잘하는 공부를 사회생활에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는 "머리"의 경험이 중요하다. 그래서 무조건 용의 꼬리에라도 있으려고 하는 욕심보다 뱀의 머리역할을 하는 현명하고 용감한 선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