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산타?
나는 예수를 믿기까지 오랜 방황을 했었다. 믿고 싶은데 믿을 수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가끔은 예수님의 결정이 너무 이성적이지 않다는 생각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성령으로 잉태해 태어났다거나,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던가, 삼위일체, 부활 등 다른 사람들이 현실에서 과학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과학이야 자연의 이치를 파내려는 노력으로 아직도 미진하고, "믿음"을 "이성적 사고" 위에 살짝 올려놓으면 오히려 믿음으로 가는 길이 쉬울 수 있었다.
나는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면서도 약한 자의 편에 서려고 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모든 스포츠경기를 봐도 늘 지는 팀을 응원하는 편이라 내가 응원한 팀이 지고야 마는 결과에 늘 기분이 상하곤 한다. 나의 이해력에 금이가게 한 사건은 성경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비록 열매는 없었어도 풍성한 나뭇잎을 자랑하고 있던 무화과에 난데없이 예수님이 저주를 내려 죽게 한 것이다 (마 21:18-22). 왜? 나름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통해 세워 가는 철학이 추구하는 기초논제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자로 재야 하는 물리학의 과학적 측량을 합쳐 탄생했다는 심리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ABC로 풀어보았다.
우선 행동을 의미하는 B (Behavior)는 예수님이 열매가 없는 나무를 쳐다본 행동이다. 쳐다본 후 결과인 C (Consequences)는 쓸모없다고 생각하신 나무에 저주를 내리셨고 나무가 말라버린 것이다. B와 C를 보면 "보고 저주하심"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A가 있다. A는 선행조건 (Antecedent)으로 예수님이 배가 고팠다는 이유가 있었다. 만약 예수님이 바로 그때 배가 안 고프셨다면 저주를 내리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어 너무 자기중심적 결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그렇다.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양치기였던 아벨은 자기가 키우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바쳤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제물을 받아주셨다. 반면 가인은 농부였는데 자기의 땅에서 난 소출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창 4: 3-5). 아니 왜? 더욱이 거부당한 가인은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혹은, 고개를 숙이니) (창 4:5)을 보면 아동발달을 전공한 나는 가인이 성장 중에 거절당한 경험으로 인해 동생을 죽일 만큼 거친 사람이 될 수 있는 원인이 있는데 하나님이 이걸 모르셨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도 나의 혼돈을 부추기는데 한몫을 한다. 아버지 이삭이 큰 아들 에서를 편애한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훌륭한 사냥꾼이던 에서를 듬직해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내향적인 성격으로 조용하게 집안일을 돕던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리브가는 편애하던 아들과 공모하여 야곱은 늙어 눈이 먼 남편이 큰 아들 에서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축복을 주기 전에 가로챈 것이다. 이리저리 아무리 보아도 야곱은 에서보다 도덕성이 결여되었다고 보이는데 엄마의 치맛바람에 하나님도 움직인 것일까?
초기 믿음 없을 당시에 나는 성경의 여기저기에서 한 구절씩을 떼어내어 읽으며 이런저런 이론을 들이대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설명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좀 시간이 흘러 믿음이 생기자 성경을 좀 더 열심히 읽고 해설서를 보고 공부하며 앞뒤의 맥락을 이해하면서 이런저런 설명에 반쯤 설득되었었고 해설을 믿으려고 노력을 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은 얼마든지 피해 가면서 하나님과 나의 믿음을 연결 지을 수도 있었다.
맥락 속에서 성경을 읽어보면 무화과 사건도 배가 고파 (A), 과일이 없는 것은 보시고 (B), 저주를 내렸다 (C)라는 눈에 보인 상황에 앞서 존재하는 동기조작 (Motivating Operations)을 알아볼 수 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앞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이미 그 무화과나무를 지나 성전으로 올라가셨다. 성전이 강도의 굴과 같이 변했음에 분노하시고 다음날 성전에 가시기 전에 무화과나무 앞을 다시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때 무화과나무를 저주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결과를 모델링을 통해 직접 보여주시고 성전으로 올라가 상인들을 내쫓으시고 청소를 하신다 (막 11:12-25).
다음날 제자들에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마 21:13)"라고 하시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막 11:22)"을 설명하며 무화과를 저주한 이유를 설명해 준 사례임을 알 수 있다 (기독일보 참조).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처럼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과일나무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상징하는 나무이기 때문에 믿음을 빙자로 교회를 어지러 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은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보이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음이랄까 생각이 떠올라 마구 웃었다. "아! 하나님은 산타였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을 세속적으로 만드는 장본인이기도 한 산타와 연결된 것이 무례하다는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도는 캐럴의 가사가 핵심인 것이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바로 그것이었다. 가인이 받친 예물 하나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가인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야곱의 장자탈취 사건과 축복을 도둑질한 한 순간의 사건보다도 처음부터 하나님은 야곱을 알고 계셨다.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든 생각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것이다.
특수목회에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선교를 할 때는 이와 같이 상징성을 띄우는 실질적인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현대 문화와도 연결을 지으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 오랫동안 왜 하나님은 편애를 하실까 하는 의문으로 지내던 나도 하나님이 산타할아버지 같구나라고 생각을 하자 이미 나를 알고 계신다는 생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마치 나보다 남에게 잘해주시는 하나님 같아 보여도 다 나에게 맞는 보상을 주시고 계신다는 생각이 든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요.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누가 순종하는 앤지 불순종하는 앤지)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우리의 작은 아픔까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까지)
짜증 낼 때 장난할 때도 (누가 감사하는지 아닌지, 아까워하는지 소중한 것을 내놓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