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에서의 뜻밖의 경험
넓은 공간일 것이라는 상상으로 칠흑 같은 어두움 속으로 손을 잡고 한 발자국을 옮긴다. 갑자기 코 앞의 검은 벽에 멈칫한다. 눈을 부라리며 안간힘을 쓰지만 한줄기의 빛도 찾을 수 없다. 닫힌 공간의 특유한 퀴퀴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안내원의 손이 안심을 시키는 유일한 신호였다.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난다. 안내원이 살짝 어깨를 두드리며 앉으라고 한다. 코 앞에서 계속 가로막는 검은 벽 때문에 앉을 위치도 방향도 모르겠다. 팔을 휘휘 저어 탁자와 의자, 그 사이의 공간을 확인한다. 안내에도 불구하고 직접 확인하지 않는 정보로는 움직여지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던 나를 찾을 수 없다.
앉자마자 나는 탁자에 가슴이 닿도록 의자를 당겼다. 익숙한 탁자와 의자 사이에 몸이 놓이자 안심이 된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 오히려 눈을 감으면 답답함이 사라진다는 말에 눈을 살포시 감아본다. 신기하게 눈앞에 검은 벽이 스르르 무너져 사라진다. 찬찬히 탁자의 네 모퉁이를 만져 크기와 차려진 음식의 위치를 확인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참가한 체험극이라 한마디도 못 알아듣고 겨우 목소리의 톤과 배경 음향으로 상황을 인지해 본다.
갑자기 구급차 소리가 점점 커지며 가까이 다가오고 다급한 발소리가 난다.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고 어쩌지? 가슴이 마구 뛴다. 위급한 상황인데 누군가의 도움만을 기다리는 무력함에 깜짝 놀란다. 익숙한 상황에 아주 생소한 감정이다.
희미한 발소리가 점점 커진다. 여자의 말을 억양과 톤으로 “힘들었니?”하고 염려를 건네는 것 같다. 아! 걷는 모습, 어깨, 얼굴 그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어 먼저 위로를 건네고 싶어도 늘 한 박자가 느리다. 상황 변화에도 비언어적 표현을 읽지 못해서 빨리 대처하지 못하고 딴소리를 한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가족 간의 대화에서 느끼던 소외감이 서서히 사라지고 함께하는 편안함이 느껴진다.
갑자기 비가 내린다. 내 몸에 와닿는 빗방울의 느낌이 새삼 너무 좋다. 손바닥을 펴 들자 예민한 손가락 끝 감각까지 자극하는 빗방울로 내가 앞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시각적 감각을 잠시 잃은 설정으로 새로운 경험에 대한 흥분과 다양한 감정들이 격양되는 시간이 길어지자 뇌가 피곤해진다. 스페인어로 알아듣는 못해서이기도 하고 강하게 오는 청각 자극을 보완하는 시각적 자극의 부재 속에서 나는 혼자 딴생각에 빠진다. 지루하다. 익숙지 않은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 아! 이중 장애다. 보이지 않고 알아듣지 못하니 모든 감정이 배가 되어 혼자의 세계로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이다.
손으로 책상에 놓여있는 음식을 더듬더듬 찾는다. 다행히 시각장애 체험인 이 어둠 속에서는 서로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편안한 마음으로 더듬는다. 나는 편식도 심한 편인데 처음 대하는 아르헨티나의 음식에서 싫어하는 것을 골라낼 수도 없다. 어렸을 때 만난 맹인 분이 떠올랐다. 시각을 잃은 지 오래되어 적응이 된
것일까? 부인이 살짝 귀에 대고 상에 놓인 반찬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그분은 슬며시 그 방향으로 젓가락을 디밀어 위치를 확인했다. 하지만 가끔 젓가락에 제대로 잡히지 않은 음식을 떨어트리기도 했고 어느 때는 빈 젓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 머쓱한 순간도 있었다.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에 촉각을 세우는 사춘기 아이들은 그 예민한 시기를 어떻게 넘길까? 여자 친구의 가족과 첫 만남이 다가올 때는 어떤 감정일까? 자신의 눈이 되어주는 예쁜 여자 친구와 결혼까지 약속을 하고도 여자 친구의 부모를 볼 용기가 없어 한 발자국도 진전을 못하던 박사과정 제자가 생각난다. “충분히 자신감을 가져도 돼!”라는 나의 이성적인 조언이 그의 감정적인 예민한 부분을 얼마나 메울 수 있었을까?
장애인들은 이겨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가로막는 약한 감정과도 싸워야 하고 사회와 시민들의 무관심과 부정적인 시각을 뛰어넘어야 하는 불 필요한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을까? 우리가 대신 싸워줄 수는 없어도 따뜻한 배려심과 이해심으로 그들을 감싸주는 응원단이 되어 한 팀으로 뛰어주면 된다. 오랜만에 찾은 한국에서 우연히 “시각장애 체험극”이라는 보들극장의 포스터를 보았다. 장애인을 이해하기 위해 바로 K-시민이 움직이는 것이다.
월간에세이 2025년 10월호 Vol 462에 초대작가로 참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