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는 나의 제2의 고향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몸도 불편하니 서울밖을 나간 적이 별로 없었다. 진짜로 쌀이 나무에서 자란다고 믿고 있었던 도시아이다. 가끔 TV에서 외국의 아름다운 잔디공원들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는 잔디밭이 별로 없다고 하는 말에 귀가 쫑긋한 적이 있었는데 중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광주를 가게 되었다. 창밖이 탁 트여 환하게 보인다. 어? 우리나라에 잔디밭이 없다고 외치던 말과는 달리 잔디밭 천지인 것이다. 너무도 푸르게 잘 가꾸어진 잔디밭이 한없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다. 벼가 자라고 있는 논이었다는 것을…
광주에는 미국 선교사들과 함께 갔다. 광주 기독병원에서 일하던 선교사들을 만나고 저녁에는 선교사들이 모여사는 광림동에 가장 오래된 선교사님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선교사님은 키는 작고 온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아담하신 분이었다. 그분은 해방직후 미국 예수교 장로회에서 파송을 받은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을 하셨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고 무등산에 숨어 기도하고 지내며 교인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연명을 했다는 이야기를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들려주었다. 우리나라를 너무 사랑해 전쟁이라는 위험 중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던 푸른 눈의 광주 할머니가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서울을 떠나 내가 제일 처음 가 본 지방도시 "광주." 나중에 학교를 통해 경상도 지역에 비해 발전이 늦는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그렇게 많은 광주지역의 사람들이 서울을 오가는 데도 4차선으로 널널하게 다니는 경부 고속도로와는 달리 한참이나 더 오랫동안 2차선 고속도로의 불편함을 겪던 부당함에도 화가 나곤 했었다. 중학교 때 순천출신의 친구와 어울리며 나도 모르게 내 말에도 전라도 사투리가 묻어 나와 광주출신의 사람들은 나에게 친밀감을 느끼며 반가워했다.
대학원을 다닐 때 광주출신 선생님 한분과 수업을 같이 들었다. 그분은 광주의 "행복재활원"이란 곳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그분을 따라 광주를 찾아보곤 했다. 행복재활원이 있는 곳은 광주의 학동인데 그 동네에 옛 이름이 "배고픈 다리"가 있었고 나는 "배고픈 다리"에 친근함을 느꼈다. 광주사람을 만나면 자랑스럽게 "배고픈 다리"를 아느냐고 묻고 그곳에 있는 행복원을 잘 안다고 말한다. 젊은 사람들은 "배고픈 다리"를 잘 모른다. 하하! 나는 그들보다 더 광주사람인 것이다.
유학을 떠나던 해 일어났던 5.18 사태를 너무도 안타깝게 생각했고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야 민주화 운동의 기반으로 인정받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혼자 멀리서 좋아했다. 한국을 떠난 후 가장 오랫동안 내 나라를 방문하는 올해 드디어 5.18 민주화 운동 기념공원을 찾을 수 있었다. 얼마나 말로만 듣던 피의 현장인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뛰고 뭉클해졌다. 내 친구들 중에는 많이 민주화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비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언젠가는 이해하는 날이 오겠지 하는 꿈을 가지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민주화운동의 본진이 될 수 있었던 희생이 우리나라를 밝히는 빛으로 우뚝 섰기 때문인지 광주가 전보다 빛나 보이고 새롭고 역동적인 느낌이 들었다. 5.18 민주화 기념공원에 도착을 하자 공원 위까지 가까이 가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잘 정돈된 계단으로 한 걸음씩 꼭꼭 밟으며 올라가던지 아니면 옆으로 마련된 언덕길로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팔로 저어야 하는 휠체어로는 올라가기엔 너무도 가팔라 보였다. 전동휠체어를 가지고 다시 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멀리서 나라를 지킨 친구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을 보러 다시 꼭 올 것이다.
대신 광주 하면 떠오르는 다른 장소, 무등산을 찾아갔다. 40여 년이 넘게 연락이 없었던 배고픈 다리의 재활원에서 일하던 친구를 찾아보기로 했다. 행복원으로 전화를 해서 친구의 이름을 대고 기억을 할지 모르지만 찾아보고 싶다고 했다. 그 친구는 오래전 정년을 했지만 기관에 연락번호를 남겼다고 한다. 아! 나도 정년을 한 나이가 됐으니 당연히 나보다 연배가 있었던 그 친구도 정년을 했을 것을 알았어야 했다. 나는 늙어감에도 머릿속에 살고 있는 친구들은 청년의 시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신기했다.
전화 속의 친구는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 친구에게 광주를 배웠는데 그는 아직도 변한 것 없이 정 많은 광주사람으로 자신의 집에 와서 머물러도 된다고 한다. 처음 그 친구가 무등산을 데려가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번 기회에 다시 무등산을 찾은 것이다. 물론 많이 바뀌었다. 중간 정도에 걸어서만 올라가야 하는 정지판이 앞을 가로막는다. 나는 그냥 기억해 낸 그 모습을 따라 최대한 가까이 간 것에 신이 났고 내려오는 길에도 아쉬움을 남기지 않은 채 무등산에 다시 한번 푸욱 안겼다가 힘을 얻고 돌아서 내려왔다.
그렇게 광주는 다시 찾고 또 찾아봐야 하는 나의 제2의 고향인 것이다.
위의 그림은 제주4.3범국민위원회주체로 인사동 미루아트센터에서 2025년 10월 15일 - 20일동안 전시되었던 "만화, 4.3과 민주주의를 그리다"에 참여해 마음에 와 닿던 그림을 찍은 것입니다. 작품을 그리신 작가님의 성함을 몰라서 기제할 수 없어 죄송합니다. 아! 이억배 작가님의 작품이라고 알려주신 독자님께 무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