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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주 Mar 17. 2024

약자의 배려심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는 정도이상!

어렸을 적에 나는 청파유치원을 다녔다. 작은 유치원으로 모든 학생들이 한 방에서 모여 여러 가지 활동을 했고 밖으로 나가면 미끄럼틀과 그네, 그리고 한쪽에 모래가 깔려있던 놀이터가 있었다. 그게 다였다. 우리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동화책을 듣기도 했고 자기 이름은 쓸 정도의 한글도 배웠다. 보건체조도 했고 무용도 했다. 나는 어느 활동도 빠지지 않고 다 참여를 했다. 그 당시 장애를 문제 삼는 선생님들도 없었고 놀리는 아이들도 없었다. 날마다 부모님들이 돌아가며 간식을 준비해 오면 다 같이 조그만 책상에 모여 앉아 까르르 웃고 떠들며 맛있게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유치원이 흔하지 않던 60년대 초라 우리는 다양한 지역사회 활동에도 참여를 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이 KBS TV방송에 우리 유치원 친구들과 함께 나가 어린이 프로에서 춤을 춘 것이었다. 우리 꼬마들은 다 엉덩이 부분에 예쁜 망사로 풍성하게 만든 투투(Tu Tu)를 입고 밝은 불로 환하게 밝힌 저편의 무대와는 대조되게 어두컴컴한 무대옆에서 우리 몸만 한 카메라를 움직이는 분들과 뒤엉켜 놓여있는 많은 전선줄과 함께 우리 차례를 기다리던 순간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나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발레의상을 입고 있었고 우리 순서가 되자 우르르 무대로 뛰어나가 선생님의 손짓에 따라 대열을 정비하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앙징맞은 댄스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오히려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의 완전통합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었던 것이네..) 모든 TV방송 일정을 무사히 마치자 우리 꼬마들보다 선생님들이 더 즐거워했었고 유치원으로 돌아가 간식파티를 했었다.


그렇게 일 년이란 즐거운 유치원 생활을 마감하는 졸업축하 잔치 겸 연말 재롱잔치를 맞이했다. 선생님들은 부모님들을 다 초청하는 큰 잔치이기에 선생님들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그중에 나와 몇몇 꼬마가 같이 춤을 추는 작품을 준비하며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열심히 연습을 하고 예쁘게 의상을 맞춰 입기까지 했다. 우리는 리허설을 했고 모든 것이 다 잘 준비가 되어 선생님들이 만족해하셨다. 다음날 드디어 부모님들이 한 명 두 명 도착하기 시작했고 우리 엄마는 유치원 전체가 즐길 수 있는 간식까지 준비해 바리바리 싼 보따리를 여러 개 가지고 들어왔다. 가운데 가르마를 중심으로 머리를 반듯하게 양쪽으로 빗어 쪽진 머리를 했고 한복으로 배저고리까지 입은 젊은 엄마의 모습은 주변사람보다도 엄마를 바라다보던 나를 압도했다. 엄마는 너무도 당당했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나는 갑자기 두려움으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재롱잔치가 시작되고 프로그램에 따라 준비했던 춤과 노래가 이어졌다. 점점 내 차례가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환하게 웃는 엄마들이 앉아있는 곳을 바라보며 우리 엄마를 찾았다. 도저히 엄마의 마음에 상처를 줄 용기가 없었다. 분명히 내가 나가서 다리를 절며 춤을 추면 거기 모인 엄마들은 다 안타까워할 것이고 당당한 모습의 우리 엄마는 마음 아파할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나는 엄마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다. 나의 방법은 내가 엄마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순서가 되기 전에 선생님한테 귓속말로 나는 춤을 추지 않겠다고 했다. 노랫소리와 웃음소리 등 다양한 소리가 뒤섞인 속에서 프로그램 진행에 몰두했던 선생님의 귀에 나의 당부가 들리지 않았는지 내 순서가 되자 내 이름과 같이 하는 몇 명 아이들이 이름이 소개됐었다.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나가 준비를 하는데 나는 바닥에 앉아 안 한다고 버텼다. 아무도 몰랐다. 전국으로 생방송되는 TV에도 출연해 춤을 췄고 재롱잔치 준비에도 열심이던 내가 차례가 되자 못하겠다는 말을 선생님들은 믿을 수 없었고 버티는 나 때문에 엄마들의 여기치 못했던 짧은 기다림은 프로그램의 흐름을 깨는 길고 긴 순간으로 변해갔다. 늘 당당해서 거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엄마는 당황했다. 딱 한마디로 나에게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춰야지"하고 달래는 듯 명령인 듯 던지고는 선생님이 해결하기를 기다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그 시간이 나에게는 영겁의 시간으로 지옥 같았지만 어린 나의 생각으로는 엄마를 보호하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른 몸동작 때문에 다른 엄마들이 나와 우리 엄마를 가엽고 안탑깝게 생각하는 상황은 나의 지옥 같던 시간보다 더욱 싫었다. 어린 나의 목적과는 다르게 엄마는 더 큰 상처를 받으신 듯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몽둥이를 앞에 놓고 이유를 대라는 엄마에게 어린 나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랬냐는 말에 답을 할 수 없어서 매를 받고 또 질문을 받고 또 매를 맞아도 나의 침묵시위는 계속됐다. 말로 왜 안 했는지를 표현하는 것이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라고 생각해 나는 매를 택하고 말았다. 나는 그날 평생 맞아보지 못한 매와 평생 동안 맞을 매를 다 맞고 말았다. 엄마가 왜 화가 났는지 나는 알았다. 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테니까. 늘 속으로 나의 장애를 아파했고 그 춤추는 아이들 사이에서 내 모습을 보고 아파하겠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웃고 떠들며 그들과 어울려 천진난만하게 생활하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나 내가 엄마를 다른 엄마들처럼 장애 없는 딸을 가진 엄마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마음일 것이다. 어린 자녀들도 부모를 이해하고 배려한다는 것이다.


한참 전에 소아마비를 가진 교수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유복한 집안에서 많은 지원과 부모님의 도움으로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어느 세미나에 와서 내 강의를 듣게 되었고 강의가 끝난 후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 사람은 사회복지가 전공이라고 한다. 나는 급 관심을 보이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며 복지분야 중에 그의 전공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여성복지라 했다. 그러며 본인의 장애 때문에 장애인 복지를 전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웬일인지 나는 그가 자신의 장애에 갇혀있어 굳이 일반적인 장애에 대한 이야기조차 불편해했다. 그냥 나는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장애인이 다 되는 것이니까 어떤 특정구릅을 위한 복지만은 아니라고 말을 하고 지나갔다. 그는 나와의 첫 만남에서 휠체어를 타고 강의를 하는 모습이 감명스러웠지만 그 교수의 장애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내가 무척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그 후 교수님과 가까워지며 그의 장애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밖에서 지쳐 힘들어 집에 들어갔을 때도 늘 방실방실 웃어야만 했던 것이 고역이었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피곤하거나 속상해하는 내색을 하면 온 집안이 무슨 일이냐며 캐묻기 때문에 그냥 늘 웃고 명랑한 척을 하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소파에 누워있으면 엄마가 늘 바닥에 앉아 아픈 다리를 계속 주물러 주었다는 것이다. 늘 그의 부모님들은 혹시 장애 때문에 좌절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다리를 주물러주는 행동은 늘 자신이 장애인임을 상기시켰기에 장애에 대한 생각이나 고민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힘든 상황에 있었다는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다. 그 교수님은 또 강의 후 학생들이 "몸도 불편한데 이렇게 훌륭한 교수님이라 존경스럽다"는 말을 제일 듣기 싫다고 했다. 그렇게 자기의 장애를 보는 눈들을 불편해하고 스스로도 자신의 장애를 애써 보지 않으려던 그 교수님은 이제 시집을 가서 잘 살고 있는 평범한 아줌마가 되어있다. 그리고는 평범한 인생에 스며든 아줌마가 다 되어서 “이제는 장애인 복지도 열심히 연구하고 있어요”한다.


아이들도 부모가 보호하려는 마음이상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서라도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호한다는 것이다. 지체장애뿐만 아니라 지적장애가 있는 꼬마들도 부모의 마음과 형제자매 그리고 친구와 이웃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배려하며 살아간다. 부모들이 너무 자녀의 장애 때문에 아파하거나 장애를 모르고 살아가게 하려고 너무 과잉보호나 특별관리를 안 했으면 좋겠다. 오히려 편하게 서로의 맘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사람들은 서로 조금씩 다르긴 해도 각자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알려주면 좋겠다. 그래서 장애를 가진 아동이 어려서부터 자신의 장애와 그 장애로 인해 필요한 서비스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고 장애를 가진 약자의 입장에서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들어주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어려서부터 현실을 알려주는 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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