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학기가 다가 오면 말이다 나는 호사 아닌 호사를 누린다.
새로이 입학을 하는 아이들에게 새 신발을 선물 하란 의미로 쇼핑몰 여기저기서 쿠폰이 날아온다.
쏟아지는 쿠폰들 틈에 나는 내가 원하는 단 한 가지의 쿠폰을 용케도 찾아낸다.
내가 원하는 쿠폰은 1족 가격에 2족을 살 수 있는 쿠폰.
바로 신발 1+1 쿠폰 되시겠다.
쿠폰을 거머쥔 나는 신발을 고른다.
내가 고르는 신발은 늘 그렇듯이 운동화.
다른 것을 고른 적이 없다.
난 언제부터 운동화만 사게 된 걸까.
어릴 적 엄마의 구두는 내게 꿈이었다.
구두 앞 코가 뾰족하고 옆축은 늘씬한 하이힐.
그땐 그 하이힐을 '빼딱 구두'라고 난 불렀다.
내가 어른이 되면 빼딱 구두만 신겠노라 늘 다짐하며
엄마 몰래 신발장에 놓인 그 구두에 발을 쏙 넣어보곤 했었다.
2
88 서울 올림픽이 열리고 있던 그날.
그날도 나는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를 부르며
비석 치기를 하고 있었다.
돌을 날리는데 그 돌이 날아간 곳이 우리 집옆 쓰레기 소각통.
매끈 납작한 그 돌을 구하느라 꽤 애를 먹은 나였다.
근데 그 돌이 날아갔으니 그걸 다시 주워야 할 짓이었다.
돌을 주으러 간 소각장에 들어있던 빼딱 구두.
이게 왠 건가 싶어 돌이고 뭐고 나는 그 빼딱 구두를 구해야 했다.
그걸 손으로 잘 닦아 냉큼 신었는데
얼마나 큰지 힘을 주고 걸어야 또각또각 소리가 겨우 났다.
굽이 다 닳아 버린 건지 굽에서 또각대는 소리가 제법 소음이다.
그것이 버려진 쓰레기였든 말든 내게는 그날의 횡재수였다.
3
빼딱 구두를 이제 제대로 신어 볼 참이다.
그렇다면 흙바닥이 아닌 곳으로 가야 했다.
그곳은 신작로.
동네에 잘 빠지게 난 새 길.
그 신작로를 빼딱 구두를 신고 걸으니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빼딱 구두가 좋다 해도 왔다 갔다 하는 재미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놀잇거리를 찾아야 했다.
88 서울 올림픽이 열리는 때 아닌가.
그 잘빠진 신작로는 육상선수들이 뛰는 경기장 같았고
빼딱 구두의 높이는 스타터 높이 같았으니
이제 뛰어야 할 차례다.
나는 빼딱 구두를 신고 달렸다.
난 생 처음 이렇게 신중하게, 갖은 폼을 다 잡고 달리기를 해본 그때였다.
빼딱 구두를 신고 달리기를 하다니 그건 정말 '나' 다운 놀이였다.
4
그리 오래 뛰진 못했다.
발이 너무 아프기도 했고 무엇보다 어스름 해져갔기 때문이다.
동네에 내 이름이 울려 퍼지기 전에 가야 했다.
빼딱 구두를 벗고 집으로 가야 한다.
이제 내 신발,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
그런데 내 신발이 없다.
분명히 잘 벗어둔다고 뒀는데 없다.
빼딱 구두를 찾았던 곳으로 가봐도,
비석 치기를 했던 곳으로 가봐도 없다.
"진아~~~ 진아~~ 밥 먹으러 안오나!~~~ 어디 갔노!"
동네에 내 이름이 울려 퍼진다.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갔는지 신발이 없다.
젠장할.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더라도
내일 체육시간에 88 서울 올림픽 기념
반별 계주를 뛰어야 하는데 운동화가 없으면 큰일이다.
빼딱 구두고 뭐고 내 운동화가 없으면 안 된다.
"진아~~~ 진아~~~! 이 가시나가 어디 갔노!"
짜증이 난 엄마 목소리가 온 동네에 퍼진다.
나는 죽을 지경이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
엄마를 마주치기 전에 찾아야 한다.
운동화를. 운동화를. 이 빌어먹을 운동화를...
5
운동화를 찾긴 했다.
내 운동화는 엄마의 손에 들려있었다.
"니는 신 도 안 신고 놀았드나? 빨리 신 안 신나!
무슨 가시나가 신도 안 신고 맨발로 놀았노 말이다!
양말 봐라 이노무 가시나! 내가 몬산다 몬살아!"
등짝을 몇 대나 맞았는지 셀 수 없을 만큼 맞았다.
양말 바닥은 괜찮았으나
내 발가락은 부어올라있었다.
빼딱 구두를 신고 달리기를 했으니 발가락마다 부어올라 물집까지 잡혀있었다.
엄마는 별나게 안 놀면 어디가 어떠냐고 면박을 준다.
발가락에 대일밴드를 감아주는 엄마 뒤로
88 서울 올림픽 육상 경기가 텔레비전에서 나오고 있다.
6
이제 빼딱 구두가 나의 꿈은 아니다.
운동화만 신는 나는 달리기를 놀이로 하지는 않는다.
빼딱 구두를 신고 달리기를 해 보이는 치기는 이제 없다.
그게 가끔 헛헛한 감정으로 변할 때가 있다.
어린 시절에 내가,
빼딱 구두를 신고 달리기를 했던 내가
그리울 때가 있다.
1+1 쿠폰으로 호사를 누리는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 와 어색한 안부를 묻는다.
'많이 컸다 별난 진아.'
_ 88서울올림픽 육상스타 그리피스 조이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