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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 Oct 04. 2021

풀 마라톤 준비 마지막 30일

왕초보 마라토너의 우왕좌왕 훈련 기록 

July 24, 2021


일 저질렀다. 99.99%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풀 마라톤 결제 버튼을 누른 건 내가 아니야. 

2019년 여름, 세 식구는 한국 놀러 가고 짧고 강렬하게 싱글라이프 코스프레하던, 에너지 넘치던 그날이 시발점이다. 2020년 레이스 얼리버드 가격 마지막 날이라는 다급한 이메일을 받고선 홀린 듯 단숨에 등록해버린 문제의 그날. 판데믹으로 결국 대회가 취소되었다는 이메일을 작년에 받고 그럼 그렇지 하고 나랑 상관없는 일 따위로 떠나보냈었지. (인정한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렇게 잊혔었는데 며칠 전 메일박스에 도착한 2021년 대회가 확정되었다는 이메일에 난 왜 꽂힌 걸까. ㅎㅎ 읽어 보니 작년 여름에 받았던 취소 통보 소식에는 내년 대회 참석으로 defer 할 건지 선택하라는 내용도 함께 있었던 거다. 마음이 진즉 떠나버렸던 난 제대로 읽지도 않고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았고 여전히 내겐 선택의 옵션이 남아있었다. 아 왜 제게 이런 옵션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일깨워주시는겁니꽈 ㅠㅠ 

에잇 모르겠다, 완주는 자신 없고 출발선에 서보기로, 정 힘들면 당당하게 기권하기로, 덕분에 바람 쐬러 샌프란 가는 걸로. 2년 전 여름의 내가 빙의된 걸로. ㅎㅎㅎ




그렇게 대회를 55일 남겨 놓고 대체 무슨 배짱이 었던 걸까? 8월이 되자 진심으로 걱정이 밀려왔고 한참 부족한 대로 훈련을 시작했다. 경기 전 30일 동안의 기록 일부를 꺼내어 읽으니 부끄러움이 밀려와 얼굴이 붉어졌다. 이렇게 엉터리로 훈련하고 부상 없이 완주한 게 감사할 따름이다.



[SF Marathon D-29]

이번 주는 산불로 공기가 안 좋아서 평일에 못 뛰고 일주일 만에 뛰었다. 남은 시간이 넉넉지 않아서 매주 5마일씩 늘여 20마일이 되면 20마일 2번 뛰어보고 나가는 게 목푠데 할 수 있을까. 오늘은 2시간 반 뛰었을 때 즈음 양쪽 종아리에 쥐가 났다 흑 ㅠㅠ 달리기 중단하고 집까지 남은 1마일을 뒤뚱뒤뚱 천천히 걷다가 결국 데리러 와달라고 SOS. 경기에서 쥐 나면 어쩌나. 걸어서 들어오지도 못하겠다 ㅎㅎ 오늘은 뛰기 전에 스트레칭 별로 안 해서 더 그런 거 같긴 한데… 마라톤 선배님들, 스트레칭 충분히 하는 것 말고도 다른 팁 있음 한수 알려주세요! (마라톤 완주 경험자들에게 SOS 청한 날)


(마라톤 선배님들 조언 중 발췌)

1) compression sleeve를 추천하고, 2) 좀 더 푹신푹신하고 support가 잘되는 운동화를 신고 3) 너무 욕심을 내지 말고 지금 뛰고 있는 페이스보다 느리게 그리고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뛰는 게 중요합니다.
한 달 미만으로 남으셨으면 20마일까진 늘리지 마시고 15~6마일 정도까지 2주 안에 한 번 더 하시고 나머지 2주는 다리 쉬어주시는 걸 추천드려요 (tapering period)! 마지막까지 무리하면 오히려 대회날 과부하 올 수 있어요. 원래 장거리 하고 2주는 적어도 휴식기간인 게 좋아서 20마일 훈련은 한 달 전이 좋아요.


이제 막 훈련 물 오르려는데 지금부터 tapering 해야 한단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구나 연...


[SF Marathon D-28]

어젯밤에 종아리 근육경련 풀고 새로 산 젤 아이스팩 (이거 진짜 득템!! 최고의 20불 투자 ㅎㅎ)으로 아이싱하고 잤다. 자고 일어나면 얼마나 뻐근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발목, 무릎, 허벅지 다 괜찮았다. 스트레칭, 아이싱 아침에 한번 더 하고 오늘은 달리기 쉼. 

달리기 중 종아리 경련에 대해 찾아 읽었는데 결론은 기본 잘 지키기. 허무하지만 사실 예상했던 답이기도. 별다른 팁은 없었다. 마음이 급해도 충분하게 스트레칭하고 중간중간 물 계속 마시고. 경련의 원인 중 하나가 탈수증이란다. 달릴 때 물을 거의 마시지 못하게 된 건 슬픈 사연이 있지만 따지지 말고 물도 다시 잘 마시기로. 무슨 운동이든 결국 다 똑같다. 기본에 충실하기! 특히 오래 달리려면.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닌데...

큰맘 먹고 브룩스 러닝화를 지르고 오늘 하루 아름답게 마무리.


(마라톤 선배님들의 댓글 중 발췌)

운동화는 100-200마일 이상 뛰기 시작하면 어떤 브랜드라도 최적의 컨디션에서 떨어집니다. 큰 경기가 있다면 새운 동화는 거의 전략적으로 한두 번만 신고 곧장 경기에 신고 가죠. (비용이 많이 들긴 합니다만) 거의 프로 수준으로 잘 뛰는 친구들 보면 훈련용으로 두 켤레를 사서 번갈아가면서 신고 (그래야 신발의 수명이 올라갑니다) 큰 경기는 새 거 사서 뜁니다.
전 다행히 뛰다 쥐 난적은 없는데 마그네슘 먹으면 방지된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SF Marathon D-25]

오늘 새 운동화가 내게 왔다. 경기용 한 켤레 연습용 한 켤레 무려 두 켤레나 질렀다. 세 켤레 참았… 장비 탓도 못하게 됐네. 도착할 운동화를 단정한 마음으로 만나려고 오늘 아침에 지난 2년 동안 함께 달린 운동화에게 작별을 고했다. 운동화 언박싱이 이렇게 설렌 것도 아마 처음인 듯하다. 우리 같이 재밌게 뛰어보자꾸나. 얘들아 잘 부탁해~


[SF Marathon D-22]

두 켤레 운동화 신고식 런 후기.

연습용으로 산 Glyerin19: 처음 신어보자마자 꽉 조이는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새 신발이라 그렇겠지 설마.. 하며 1-2 마일 뛰어보기로. 뛰기 시작하고 곧바로 불편한 느낌이 들었는데 점점 발 앞부분에 조여 오는 강도가 심해져서 바로 귀가했다. 신발 안쪽의 굴곡을 보니 내 발 모양과 맞지 않았던 거다. 나는 약간 평발인데 이 신발은 아치 부분이 꽤 높게 올라 온 디자인이었다. 아마존 리턴이 쉬운 덕분에 바로 다음날 리턴하고 Ghost 13을 새로 주문했다.

경기용으로 산 Hyperion Elite II: 일단 신발이 너무 가볍다. 오늘 아침에 2마일 런을 해보았는데 뽀잉뽀잉 쿠션감이 좋다. 경기하는 날 이거 신고 솜털처럼 가볍게 뛸 수 있기를 ㅎㅎ


[SF Marathon D-21]

여섯 시쯤 바나나 한 개, GU 에너지 젤 하나 입에 털어 넣고 여명에 집을 나섰다. 오늘은 끝까지 종아리에 쥐 나지 않는 걸 목표로 중간중간 건널목 신호 기다릴 때마다 스트레칭해줬다. 해가 뜰 무렵 Baylands Nature Preserve Bay Trail을 동쪽 방향으로 달리는 풍경이 몽롱+신비+고요했다. 

요즘 달리기 붐이라더니 혼자 뛰는 사람, 삼삼오오 함께 뛰는 그룹 모두 많이 만났는데 긴 달리기를 덜 외롭고 덜 힘들게 해주는 반가운 마주침이었다.



[SF Marathon D-20] 

어제 롱런의 후유증으로부터 회복 중이다. 달리기는 쉬고 스트레칭+아이싱. 주문한 Ghost13 신어보니 착용감이 괜찮다. 쿠션이 어떨지 궁금한데 내일 뛰어봐야겠다. 달릴 때 물을 좀 더 마시기로 마음먹고 물통이 포함된 벨트를 샀다. Shopping goes on~~ 살 것들이 계속 나오네.

하체 근력이 부족한 탓에 하프 거리쯤 되면 종아리 허벅지 모두 무척 뻐근해지는데 솔직히 완주에 자신 없는 가장 큰 이유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10분 하체 근력운동을 챙겨서 하고 있다. 스쾃-런지(좌, 우)-벗 윙크-사이드 스쾃-숏 스쾃-점프 스쾃 각각 1분씩, 중간 30초 휴식하면 10분쯤 걸리는데 하체가 부풀어 오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 놀랍다. 


[SF Marathon D-15] 

꼬꼬 찜기와 삶은 계란.

슬의 생 2 한 에피소드에서 익순이 라지 사이즈 스테인리스 보울에 삶은 계란을 쌓아놓고 먹는 장면에 꽂혔다. 계란 몇 개 더 먹는다고 근육이 생기진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뭐라도 더 해보고 싶다는 갈급함 때문이었으리라. 2년 전 즈음 한국에서 사 온 꼬꼬 찜기가 드디어 빛을 발할 때가 온 것. 아 자신감 넘치는 고고한 자태 ㅎㅎ 지난주부터 “근육아 생겨라” 주문을 걸며 거의 매일 1일 2 삶은 달걀 먹기 리튜얼(?) 수행 중. 전자레인지마다, 꼬꼬 찜기에 넣은 계란의 개수에 따라, 계란의 크기에 따라 완벽한 반숙의 타임이 오묘하게 다른데 이제 반숙 계란 삶기 숙련공이 되었다. 계란을 너무 많이 사서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엔 감자 계란 샐러드도 만들어먹고. 급 먹방이 돼버린 오늘의 훈련(?) 일지 


[SF Marathon D-10]

왠지 대회 전에 이 책을 읽고 싶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특히 ‘4장. 나는 소설 쓰는 방법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는 정말 좋았다.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실무적으로. 얼마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 지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무슨 일이 있어도 달리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SF Marathon D-7] 

남은 일주일은 파스타 실컷 먹고 워밍업 정도 하며 보낼 계획이다. 

내가 달릴 코스를 visualization 해주고 landmarks, 로컬 코치(2017, 2018 대회 우승자)의 notes도 알려주는 Neurun이라는 앱을 다운로드하여 코스를 둘러봤다. 처음 사용해 본 앱이지만 mental prep도 훈련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신규 사용자 경험이 꽤 괜찮았다. 

어제 오랜만에 테니스를 치다 오른쪽 발목을 살짝 삐끗해서 걱정이었는데 아이싱을 열심히 하고 있어서인지 많이 좋아졌다. 일주일 동안 걷는 것도 조심해야지 ㅋㅋ

모닝런 하면서 5년 전 캘리로 이사오던 날에 공항에서 렌트한 차로 내가 살 동네로 들어올 때 보았던 ‘Welcome to Palo Alto’ 표지판을 오랜만에 보았다. 친한 지인을 한 손으로 충분히 꼽을 정도였던 그때의 긴장감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SF Marathon D-1] 

드디어 내일이다. 가볍게 30분 러닝과 100M 대시 몇 번 한 뒤 시원하게 샤워하고 친구가 응원차 갖다 준 비타 500 원샷하고 스트레칭도 했다. 내가 숨 쉬는 공기 속에 설렘이 기분 좋게 둥둥 떠있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다. 오늘 밤 잘 자면 되겠다.

평일에 하루 샌프란에 점심 미팅이 있었는데 마침 도착지 가는 길에 내일 대회 출발점을 지나쳤다. 곧 함성과 응원이 가득할 그곳을 사진으로 담았다. Mission & Embarcadero에서 출발해 해안선을 따라 주욱 달리다 Presido를 지나 금문교를 건너 소살리토 입구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와 다시 금문교를 넘어 coastal trail을 살짝 뛰고 Golden Gate Park의 반 정도를 가로질러 동쪽 방향으로 시내를 관통해 mission district, potero hill, dogpatch를 지나 oracle park가 보이면 거의 결승점이다. 아름다운 코스를 두 발로 뛸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니 행운이다. 물론 다 뛸 수 있을진 다른 문제.

Bib을 우편으로 받으니 실감이 난다. 오늘 family friendly 5k 경기가 있었는데 내년엔 나도 아이들이랑 함께 뛰면 좋겠다. 오늘 탄수화물 많이 먹고 잘 자고 내일 재밌게 뛰자!



September 19, 2021, D-DAY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어둠을 뚫고 45분을 달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긴장과 떨림의 공기 속에서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달리기 후기는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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