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달 Dec 18. 2021

희생이라 부르지 말라.

단지 사랑일 뿐이다. 

과자를 누가 뺏어 먹는다고? 

"선생님! 이거 엄마, 아빠가 뺏어 먹으면 어떻게 해요?"

내가 집에 가서 먹으라고 과자를 나눠주자 한 아이가 물어본다. 


"안 뺏어 드실 거야."

"그래도, 혹시나 모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나도 모르게 피식, 실소가 나온다. 다른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눠주며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걱정 마. 부모님은 주면 더 주고 싶어 하지 너희 것 뺏을 생각 없으실 걸." 


그렇다.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다. 항상 더 주지 못해 조급하다. 충분히 주었음에도, 이미 다 퍼주어서 마른 우물 바닥에 있는 흙까지 맨손으로 긁어 담아 주고 싶다. 


과연 아이를 낳기 전에는 무어라 말했을까. 부모님을 무슨 도둑으로 만드냐며, 부모를 의심하는 그 아이의 마음을 자식의 입장에서 타박했으려나. 


희생 말고 다른 거 

아이가 돌 쯤 지났을 때, 우연히 남편과 저녁을 먹다가 나눈 대화가 있다. 


"여보, 나는 내가 아이를 키운 노력을 희생이라고 부르는 게 싫어."


희생. 그래, 희생. 다 큰 자식은 부모가 보낸 수십 년의 시간을 희생이라고 부르고는 했다. 나 역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부모님이 나와 동생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며 자랐다. 


부모 각자가 보여주는 모습은 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자유롭게 시간을 쓰지 못하는 것, 늘 우선순위에 가족과 자식을 두고 산다는 것은 모든 부모가 가진 공통분모임이 틀림없다. 물론 이런 나의 수고를 먼저 희생이라고 치하해준다면 딱히 나쁠 건 없겠다. 내 아이의 마음에 겸손이란 것이 무럭무럭 자랐다는 증거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내 딸이 나의 노력과 시간을 희생이라고 부른다면 감히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그것은 결단코 희생이 아니었다고. 날것 그대로의 사랑이었다고. 내가 선택한 것이며, 그 선택의 결과가 너여서, 오로지 너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이었다고. 그러니, 희생이란 말로 '나'를 '버린'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엄마

오늘 갑자기 동생이 자기가 일하는 병원에 와서 비타민 D주사를 맞으란다. 형부도 놔달라니까, 이건 엉덩이 주사라고, 언니 엉덩이는 볼 수 있어도 형부 엉덩이는 못 보겠다고. 한바탕 웃은 뒤, 그게 어디에 좋냐니까 면역력 보강에 도움이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참나. 누가 동생에게 시켰는지 안 봐도 비디오다. 


요즘 매번 위장약을 먹어야 할 만큼 소화력이 떨어지고,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를 낳은 뒤 평생 앓아본 적 없는 다래끼를 벌써 몇 번쯤 겪어본 내가 안쓰러울 사람은 단 하나다. 


우리 엄마. 


아아, 평생을 주었어도 우리 엄마는 또 마른 우물 바닥의 흙을 성실하게 퍼 담아 나에게 주려고만 한다. 물이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듯, 부모의 사랑도 제가 생각한 옳은 방향으로 흘러 간다. 아이는 매 순간 부서질까 두렵고, 그래서 부드럽게 한없이 보듬고 싶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내 아이가, 우리 엄마에게는 내가 그러하다. 


글쎄, 부서지기에는 무척 단단하게 커 버린 나지만 엄마의 마음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당히 동생에게 엉덩이를 까보이고, 엄마의 마음이 담긴 주사나 한 방 맞아야겠다. 


아린 주사 바늘 끝으로, 희생이 아닌 사랑이 흘러들어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근의 마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